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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석 노트] 시와 가사, 작곡가 그리고 명곡의 탄생은?

가곡을 구하는 것은 가곡, 누가 만들 것인가?

[탁계석 노트] 시와 가사, 작곡가 그리고 명곡의 탄생은?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시와 가사는 다르다. 시는 시인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표현이라면, 가사는 노래를 만들기 위한 ‘의도된 언어’다. 곡의 용도, 부를 사람의 음역, 감상 방식 등을 고려해 목적성과 기술을 갖고 만들어지는 것이 가사다. 좋은 가사란 단지 운율이나 표현이 아름다운 것만으론 부족하다. 사회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며, 음악과 함께 시대를 움직여야 한다. ‘목련화’, ‘그리운 금강산’, ‘향수’ '시월의 멋진 날'처럼 시와 선율이 잘 어우러져 국민의 기억에 남는 명곡이 되었지만 이도 점차 국민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세대가 바뀌어 '가곡'이 뭔지도 모르는 세대가 사회의 주역이 되었다. 자칫 이러다가 '시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인가! K팝 대세에 노래없이 격렬한 춤만 추면 그만일까? 타고난 가무민족인데, 가창을 버릴 것인가? 그래서 오늘날 가곡이 단지 클래식의 전통에 머물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삶과 감정, 공감대를 담아야 한다. 세계로 나아갈 K-Classic 가곡이 되기 위해선, 작사가와 작곡가가 함께 시대정신을 고민하고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추는 깊은 연구가 그래서 필요하다. 성악에 여러 파트가 있고 성악이 표현하는 것 역시 다양하다. 기교를 표현하거나 의미를 담은 것이나 부르는 사람 입장에선 곡 하나 고르는 것이 외출 때 의상을 고르는 것 보다 훨씬 까다롭다. 특히 전문 성악가들은 자기 소리와 성향에 적합한 레퍼토리를 최적화하면서 그 곡만 계속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곡을 부르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 레퍼토리를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부르는 사람이 고려하는 것의 또 하나가 청중이다. 관객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두고 무대의 클래스를 고려한다. 또 하나 성악의 기술과 에너지가 많은데 우리 가곡이 가창을 충족시킬만큼 작품성이 뒷받침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중에서도 대중이 선호하는 것의 유혹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식상한 메뉴잔치가 되고 만다. 동호인들은 그 협소가 훨씬 큰 것도 성악의 기술과 마인드 탓이다. 도전 보다 쉬운 것만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일부에서는 자작시의 보급이란 표현이 새로운 가곡의 접근을 막는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에도 여러 기법들이 등장했다. 시어가 설득력이 있어 공감이 가는 내용이거나 외국의 잘 알려진 유명시를 가곡으로 끌어 안는 것, 오늘의 세대에 맞춤형 감성으로 달짝지근하게 양념을 넣는 경우다. 동호인들은 마치 다방 커피에 젖은 향수가 있는 듯 일제 잔재같기도 한 애상조의 노래들을 좋아하는 경향이어서 새로운 감각의 가곡이 손에 닿지 않는 것 같다. 여기에 현대가곡은 성악가도, 동호인도 얼씬 거리지 않는 모습이다.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시대가 공감하는 가곡을 만드는 것은 오늘의 과제임에 틀림없다. 물론 토론을 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겠지만 상호의 노하우를 열어 가면서 '가곡'을 구하는 것은 '가곡'이란 명제를 기억했으면 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작품은 청중에게 말한다. 불러 달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지 않으면 안될 멋진 작품이 나와야 한다. 막강한 홍보와 이벤트를 즐겨했던 옛시절의 방송사의 가곡의 밤은 오랫적 이야기다. 우리가 발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다. 명곡을 하루 아침의 즉흥에만 기댈 것인가?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가? 우리가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이 혼돈과 방황, 불안의 벼랑끝에서 '이 풍진 세상을' 노래할 것인가?

[ 탁계석 노트]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 공공예술에선 용납될 수 없다

시민 문화 향수권 누가 보호하고? 예술은 누가 신장시켜야 하나?

[ 탁계석 노트]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 공공예술에선 용납될 수 없다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무관심과 방임은 공공 예술의 수준 하향을 부른다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이라는 자세는 개인의 취미나 사적인 영역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공공예술단체의 경우, 이러한 방치는 공공 신뢰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며, 시민의 문화향유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예술단체는 시민의 위임으로 예산을 받아 활동하는 만큼, 그 예술적 결과물은 시민의 삶에 실질적인 감동과 의미, 사회적 가치를 환류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시민은 예술을 향유할 권리는 있지만, 그 질과 책임에 대한 평가와 감독의 권한은 행정당국과 전문가 집단에 위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행정관료의 경우 예술적 전문성이 부족하여 판단에 한계가 있으며, 평가의 객관성과 공정성 또한 담보되지 않기 쉽습니다. 따라서 언론, 비평가, 매체 전문가가 나서서 공연예술의 공공성과 예술적 완성도를 평가하고 리뷰하는 시스템이 절실합니다. 이러한 인식 아래, 문화체육관광부는 만시지탄 본격적인 '비평 프로젝트 사업 ’을 통해 전국 32개 지자체의 대표예술단체를 선정하고, 그 활동에 대해 전문가의 비평 및 평가제도를 시범적으로 도입했습니다. 이는 공공투자의 효율성과 예술단체의 내적 긴장을 동시에 도모하는 선진적인 모델로, 예술 생태계의 질적 향상을 꾀하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무용단, 합창단, 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공정한 리뷰 시스템이 정착된다면, 단순한 행정 보고서나 성과지표가 아닌, 예술 자체의 질적 내실을 반영한 실질적 평가가 가능해집니다. 이는 예술단체 스스로의 수련과 갱신을 유도하고, 시민과의 신뢰 회복 및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구체화하는 기반이 됩니다. 특히 최근에는 K-POP을 중심으로 K-아티스트와 K-콘텐츠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지만, 오히려 일부 공공예술단체는 여전히 철지난 서양 레퍼토리를 개념 없이 복제하거나, 단체의 존속을 위해 형식적인 공연만 반복하며 ‘떼우기식 공연’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산을 만들지 못하는 공공의 안일과 예술감독의 게으름에 단원들 역시 힘겨운 고초를 겪고 있고, 일부에서는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호형호제로 시민 세금만 축낸다는 비판이 끌어 오르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에서 뒤쳐져 포기 수준의 단체 존립은 80년대 생성된 공공단체가 글로벌 시대에오히려 한국의 위상은 저해하기에 해산하거나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더 늦기 전에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이상, 그 정당성과 효과성에 대한 검증은 필수입니다. 비평가들과 전문 매체가 사명감 갖고 역할해야 이에 한국예술비평가협회는 우수 매체 및 전문가들과 연대하여, 공공예술에 대한 비평제도 정착에 박차를 가하고자 합니다. 비평은 단순한 평가를 넘어, 예술단체의 수련을 돕고 방향을 제시하는 공공 담론의 기초입니다. 예술은 사회적 책임을 지는 순간부터 ‘공공재’로서 기능해야 하며, 이에 대한 비평 역시 문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핵심 장치입니다. 앞으로 공공예술의 재정지원과 비평시스템은 상호 보완적 관계로 작동해야 합니다. 비평이 없는 예술은 무관심 속에 쇠락하고, 감시 없는 공공자금은 결국 부실한 결과물로 시민을 실망시키는 악순환입니다. 이제 ‘비평을 통한 공공성 회복’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그 시작은 책임 있는 감상, 그리고 성숙한 시민예술문화로부터 출발합니다.

큰바위 얼굴과 노벨상,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의 상징

K-Classic  역시 그 출발점에서 인류의 내일을 응시한다

큰바위 얼굴과 노벨상,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의 상징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홍익정신, 한글과 세종, 한류 한 단계 격상이 필요하다 미국 뉴햄프셔주의 한 산기슭에는 오랜 세월 바람과 비에 씻긴 자연의 조각품, ‘큰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이 있다. 이 전설은 한 소년이 매일 산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저 바위처럼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 믿고, 결국 그 얼굴을 닮아가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이상과 실현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큰바위 얼굴'을 통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숭고한 지향을 되새긴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문학상, 예술상, 학술상들이 있다. 각 분야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활동을 인정하며 주는 상들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노벨상(Nobel Prize)’처럼 인류 보편의 기준으로 평가되는 권위있는 상은 드물다. 노벨상은 단순히 수상자를 칭송하는 것을 넘어, 인류의 진보와 공공선에 기여한 정신을 기리는 세계적인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노벨상을 부러워한다. 동시에, 그 후원자인 알프레드 노벨의 철학과 유산을 존경한다. 인류를 위한 과학, 문학, 평화의 가치를 실현한 이들에게 후한 명예와 영광을 안기는 상, 그것은 단순한 트로피가 아닌 인류의 등불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도 노벨처럼 인류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에 울림을 주는 후원자와 시스템을 가질 수 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우리 스스로 그런 상징을 창조하고, 육성할 시점이다. 한국의 인문예술 생태계를 뒷받침하고, 지속가능한 문화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후원 기반이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자금 지원을 넘어, 위대한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가치의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다. ‘노벨’을 꿈꾸되, 한국적 철학과 창의성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모델을 세계에 제시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큰바위 얼굴이며, 홍익정신은 우리가 지향하는 정신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진 자의 돈’이 아니라 ‘큰 꿈을 위한 후원’이다. 노벨이 그랬듯, 위대한 상은 위대한 후원에서 시작된다. K-Classic 역시 그 출발점에서 인류의 내일을 응시한다.

석경고미술연구소 황규완-조선시대의 백자 달항아리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석경고미술연구소 황규완-조선시대의 백자 달항아리

K-Classic News 석경 황규완 | 보름달을 연상시키듯 아름다우면서도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의 둥근 항아리를 우리는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 높이 40센티미터 이상 되는 큰 항아리를 이른 바 백자대호白磁大壺라고 해서 더욱 귀하게 여긴다.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18세기 중엽인 영조 시대에 들어 1721년부터 1752년 사이 조선왕조 관영 자기소가 운영되던 경기도 광주廣州 금사리金沙里 가마에서 처음 선을 보였고 1752년 이후에는 광주 분원 가마에서도 초기에 일부 제작되었지만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본래 백자 달항아리는 전통 물레로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릇 모양을 빚어 올릴 때 아랫부분이 굳지도 않은 상태에서 윗부분을 둥글게 만들면 태토가 주저앉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양의 항아리들은 대개 어깨가 풍만하고 허리가 홀쭉한 이른바 장호長壺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보름달처럼 넉넉한 느낌의 둥근 항아리를 만들고 싶은 조선 도공들은 이 기술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달항아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 기술의 비법이란 커다란 왕 대접 두 개를 만들어 그것을 위아래로 이어 붙여 항아리를 만드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다. 이런 연유로 모든 달항아리는 가운데 부분에 이어붙인 자국이 있고 전체적인 형태는 아주 동그란 것이 아니라 둥그스레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바로 이 점 때문에 달항아리는 인간적인 채취가 살아있는 너그러운 형태와 어질고 친숙한 선 맛을 지닌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훗날 예술가와 문인들이 수없이 칭송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최순우 선생이 “달항아리는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한 구절을 들 수 있다. 본래 달항아리의 용도는 당시 궁중에서 감상용이나 의뢰용으로 꽃을 곶아 사용된 것으로 추축되며 현존하는 달항아리는 250여 년을 견디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수량은 국내외를 통 털어 약 30점 정도로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석경고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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