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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석 칼럼] KBS K-가곡 슈퍼스타, 노래는 경연하지 않는다

K-Classic News 6만명의 독자뷰, 그 다음은 무엇인가?

[탁계석 칼럼] KBS K-가곡 슈퍼스타, 노래는 경연하지 않는다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어제 KBS 슈퍼 K-가곡에 대한 손영미 작가의 칼럼이 본지에 실리자 역대급 독자 6만 뷰(63,996)를 기록한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사건이다. 가곡이 낡은 장르라는 통념을 단번에 무너뜨렸고, 노래 그 자체의 힘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곧 다음 질문을 던진다. 왜 노래는 경연이라는 틀 안에서만 비로소 주목받는가. 손작가의 말 대로 노래는 본래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삶의 순간을 건너며 스며드는 감정이고, 반복 속에서 깊어지는 기억이다. 경연은 주목을 만들 수는 있어도, 노래의 생명을 연장하지는 못한다. 무대 위의 감동이 일상의 레퍼토리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조회수는 박제된 기록으로 남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K-클래식이 제안하는 대안은 분명하다.지금 정부의 정책 기조에 ‘문화가 있는 날’을 월 1회 수요일 하던 것을 매주하여 월 4~5회로 늘린다는 것이다ㆍ이를 기점으로 방방곡곡 우리동네 합창단을 만들어 시·군·구·읍·면·동까지 확산하는 기초 풀뿌리 문화 구조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공연 확장이 아니라 찾아가는 문화를 넘어서 찾아 오는 문화로, 지역이 공급만 기다리는 천수답 문화가 아닌 자생력을 키우는 문화 주권주의의 실행이다. 업그레이드된 문화복지이며, 나아가 고립과 단절을 치유하는 정신건강 ESG의 실천 모델이다. 가곡은 더 이상 일부 애호가의 취향이 아니라, 기업과 사회가 함께 관심 가질 때 공공 자산이 된다. 또 이번 KBS 가곡의 추진 과정에서 개인 후원자 ‘두남재’와 같은 존재는 메세나의 본질을 다시 일깨운다. 거대한 자본 이전에, 한 사람의 결단이 예술 생태계를 살린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이 불씨를 세계의 산불로 확장하는 길은 한글과도 맥을 같이한다. 세계 곳곳의 세종학당과 연계될 때, 가곡은 언어와 음악이 만나는 글로벌 문화 자산으로 진화할 수 있다. 6만 명의 독자가 가곡을 보았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내일도 가곡을 만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노래는 경연하지 않는다. 노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작가의 말 대로 K-클래식은 지속성을 갖고, 이 이슈화를 구조화하며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

노래는 경쟁하지 않는다, K-가곡 슈퍼스타 코리아 가 우리에게 묻는 것

누가 이 시대의 언어로 가곡을 다시 숨 쉬게 하느냐

노래는 경쟁하지 않는다, K-가곡 슈퍼스타 코리아 가 우리에게 묻는 것

K-Classic News 글 │ 손영미 - 작가·시인·칼럼니스트 〈K-가곡 슈퍼스타 코리아〉는 단순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 무대는 잊혀 가는 장르를 소환하기 위한 기획도, 새로운 스타를 급조하기 위한 이벤트도 아니다. 이 프로그램의 출발점에는 하나의 분명한 질문이 놓여 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가곡은 여전히 살아 있는 언어인가.” 그래서 이 무대는빠른 유행보다 느린 호흡을 선택했고, 자극적인 편집보다 한 곡의 완주를 택했다.가곡을 다시 경쟁의 장으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과 목소리가 만나는 자리로 초대했다는 점에서 이 기획은 조심스럽고도 용감하다. 요즘 세상에서 노래는 자주 순위를 부여받는다. 조회 수로, 점수로,탈락과 생존이라는 이름으로.그래서 ‘슈퍼스타’라는 단어 앞에 ‘가곡’이 붙었을 때, 나는 잠시 멈춰 서게 되었다. 가곡은 원래 이기기 위해 불리는 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곡은 사람의 속도를 늦추고 말의 온도를 되돌리는 노래다. 기교보다 호흡을 묻고, 성공보다 태도를 묻는다. 그 가곡이 <K-가곡 슈퍼스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KBS홀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은 단순한 방송 편성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 무대는 ‘누가 더 잘 부르느냐’를 겨루는 자리가 아니라, 누가 이 시대의 언어로 가곡을 다시 숨 쉬게 하느냐를 묻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제시된 지정곡들 역시 심사를 위한 잣대라기보다 가곡이라는 음식에 더해진 양념에 가깝다. 같은 악보를 앞에 두고도 어떤 이는 삶의 그늘을 꺼내 들 것이고, 어떤 이는 시간의 빛을 노래할 것이다. 지정곡은 목소리를 가두는 틀이 아니라 각자의 서사를 드러내는 접시다. 가곡은 원래 불린 사람만큼이나 불러온 시간의 냄새를 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2007년 이전 출생자,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도전 가능하다는 문장은 나이와 경력을 가리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곧 늦게 시작한 사람도, 다시 돌아온 사람도, 오래 노래해 온 사람도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다는 뜻이다. 대상 상금 5천만 원, 총 상금 1억 1천만 원. 숫자는 크다. 그러나 이 무대의 진짜 보상은 돈이 아니라 존재의 승인에 가깝다. “당신의 목소리는 아직 이 시대에 필요하다.” 그 한 문장을 공영방송의 무대에서 공식적으로 건네는 일. 3월 말, KBS홀에서의 녹화는 아마도 치열한 경쟁의 현장이겠지만 나는 그보다 노래 하나하나가 품고 올라올 각자의 삶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가곡은 늘 개인의 서사를 안고 불려 왔다. 떠나온 고향, 지나온 계절, 견뎌온 침묵들. 그래서 가곡을 부르는 일은 노래를 부르는 행위이기보다 자기 삶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 용기에 가깝다. 〈K-가곡 슈퍼스타 코리아〉는 한국 가곡이 더 이상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가곡도 지금의 언어로, 지금의 숨결로 다시 불릴 수 있다는 믿음. 이 프로그램이 성공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누군가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곡이 여전히 현재형의 예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노래는 경쟁하지 않는다. 다만 남는다. 누군가의 삶에, 어느 날의 기억에, 조용히 오래. 올봄, KBS홀에서 울려 퍼질 가곡들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묻기를 바란다. 우리는 아직 이 노래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이 노래를 다음 세대에게 건네줄 용기가 있는가. “별은 순위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끝내, 남는 목소리에서 태어난다.”

[황순학의 문화노트] 시대별 클래식 음악감상을 위한, 바로크와 로코코의 모든 것

바로크·로코코를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쾌락 그리고 유희의 미학을

[황순학의 문화노트] 시대별 클래식 음악감상을 위한, 바로크와 로코코의 모든 것

K-Classic News 황순학 교수 | 2. 화장품 (Les cosmétiques, l’époque baroque et rococo.) “사소한 미의 도구가 살롱을 움직인다.” 바로크·로코코시대 살롱은 단순한 우아한 모임이 아니었다. 17–18세기 프랑스에서 살롱은 대화·평판·취향·접근권이 교차하는, 일종의 사회적 기술이 펼쳐지는 무대였다. 그리고 그 기술을 눈에 보이게, 또는 냄새로 느끼게 만든 것이 파우더, 루주, 점패치(무슈, mouches), 하이힐, 화장품 보관함(부아트), 향수 등이 있었다. 이 도구들은 개인의 미용을 넘어 관계 맺기, 권력 신호, 계급의 문법 장치로 작동했기에 더욱 그렇다. 1) 파우더(La poudre): “흰 피부”가 아니라 “시간과 노동을 면제받은 몸”의 표면 살롱의 미학은 ‘자연’이 아니라 ‘연출’에 더 가까웠다. 파우더(얼굴의 백분, 머리·가발 분)는 얼굴의 입체를 지우고 조명을 평탄화해 표정의 미세한 흔들림을 덜 드러내는 효과를 냈다. 중요한 것은 미용 효과보다, 파우더가 표상한 사회적 의미다. 파우더는 야외 노동의 흔적(그을림·잡티)과 질병 흔적(흉터·자국)을 ‘가리는’ 동시에, “나는 밖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신호를 생산했다. 당대의 백분과 루주의 결합이 계급적 미학으로 자리했으며, 일부 재료에는 납 등 독성이 포함되기도 했다는 점은 아름다움이 곧 위험비용을 전제했던 시대의 잔혹한 아이러니이었다. 살롱의 아침 일상은 이 파우더에 의한 ‘투알레트(toilette)’로 시작되었다. 상류층 여성은 하루의 사교 활동에 앞서, 지인·친족·방문객을 맞이한 상태에서 머리 손질과 화장(파우더·루주 포함)을 수행했다. 즉, 화장은 사적 행위가 아니라 방문객 앞에서 이루어지는 공적 퍼포먼스였다.살롱이 말의 향연장이라면, 투알레트는 얼굴 표면을 장식하는 장이었다. 표면을 세팅하며, 그날의 관계 즉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인상을 남길지를 동시에 세팅하는 셈이었다. 이처럼 파우더가 갖는 의미를 잘 공감할 수 있는 곡으로 프랑스와 쿠프랭 (François Couperin))의 신비한 바리케이드 (Les Barricades mystérieuses)란 곡이 있다. 파우더는 살롱에서 얼굴을 단순히 하얗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표정의 숨김이나 드러남과 감정의 과잉을 완충하고 촛불 아래에서 빛을 부드럽게 퍼뜨리는 조명 장치처럼 작동했다. 이런 메커니즘이 이 곡에서도 발견된다. 프랑스 바로크 건반 음악의 핵심은 부서진 듯 흩뿌려진 아르페지오 질감(style brisé)이 핵심인데, 이 곡 역시 음들이 덩어리로 묶여 있지 않고, 가늘게 분산되고 서로 겹침으로써 마치 파우더 입자가 공기 중에 떠서 피부 위에 얇게 퍼지며 자리 잡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 곡을 감상할 때는 개별 멜로디를 따라가기보다, 여러 성부가 겹쳐 만드는 섬세한 표면의 질감을 들으려 애쓰면 연속적으로 반짝이는 결들이 느껴지는 곡이다. 이 곡의 리듬은 겉으로는 유동적이지만, 내부는 단단히 질서 잡혀 있고, 숨겨진 리듬은 우아함이 고정되어 있다. 이로 인해 당시 살롱의 분위기이었던 겉으로는 자연스러워 보이되, 극도로 통제된 분위기를 이 곡을 통해 생경하게 엿볼 수 있다. 2) 루주(Le rouge): ‘혈색’이 아니라 ‘통제된 열정’의 표식 완벽하게 희게 만든 얼굴 위에 루주(볼·입술의 붉음)를 바르는 행위는, 생리적 홍조를 모방하면서도 홍조의 원인(수줍음, 흥분, 욕망)을 제거했다. 다시 말해 감정의 자연발생이 아니라 감정의 디자인이었다. 루주는 절제된 관능을 시각화했고, 동시에 나이·계급·평판에 따라 도덕적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살롱에서 루주는 대화의 리듬과도 맞물렸다. 논쟁이 격해져도 얼굴은 정돈되어 있어야 했고, 말이 유려할수록 표정은 더 관리되어야 했다. 루주는 그 관리의 일부였고,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신호를 붉은 루즈로 드러내는 셈이었다. 당시 붉은 루즈의 느낌을 잘 반영된 곡으로는 장-필리프 라모(Jean-Philippe Rameau)가 작곡의 이국의 인물들(Les Sauvages)이란 곡이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살롱에서 루주는 단순한 혈색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 표출보다는 디자인(연출)된 표정으로 전환하는 도구이듯이, 라모의 이국의 인물들 (Les Sauvages)은 제목부터가 캐릭터(인물/장면) 음악이며, 리듬과 악센트가 강해 단숨에 시선을 잡아끄는 색감을 갖는다. 파우더가 표면을 균질화했다면, 루주는 그 표면 위에 의도적인 생기와 위신을 콕 찍어 넣는 장치인데, 이 곡은 바로 그 선명한 대비(하얀 바탕 위 붉은 포인트)를 소리로 재현한다. 리듬의 발화라 할 수 있는 규칙적인 박 안에서 갑자기 튀는 악센트는 볼의 붉음처럼 순간순간 등장한다. 우아함과 쾌락과 유희의 야성이 공존했던 살롱의 미학은 순수한 자연이 아니라, 자연을 길들여 전시하는 방식이었듯이, 이 곡을 통해 이국적인 긴장감을 들을 수 있다. 3) 점패치((Les mouches): 얼굴 위의 미시적 기호학, 그리고 ‘대화의 단축키’ 점패치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당시 흉터(특히 천연두 자국 등)를 숨기는 실용적 이유에서 출발해 인공 점의 유희와 쾌락으로 확장된다. 점패치의 또 하나의 핵심은 휴대성이었다. 점패치와 루주를 함께 담는 작은 상자(boîte à mouches)는 살롱 문화의 이동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즉, 점패치는 표정의 도구이자 휴대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장치였다. 말로 길게 설명하지 않고도 오늘의 나는 이 표정을 취한다는 선언을 얼굴에 부착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점패치 위치별 의미(예: 눈가=열정, 입가=유혹 등)는 당대 풍자화와 에티켓 담론 그리고 후대의 기록에서 자주 언급되지만, 지역·시기·집단에 따라 그 변주가 큰 살롱의 속어에 가까웠다. 점패치는 당시 살롱 문화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소비하는 게임 자체를 만들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살롱의 대화가 암호와 뉘앙스로 굴러가듯, 얼굴의 패치 또한 살롱의 유희와 쾌락을 위한 암호였다. 이런 점패치와 잘 어울리는 곡으로 장-필리프 라모 (Jean-Philippe Rameau)의 무심한 여인(L’Indifférente)이란 곡을 들 수 있다. 점패치는 점 하나를 찍는 그 사소함이 오히려 살롱에서는 강력한 신호가 되었듯이, 라모의 무심한 여인은 “나는 무심한 척한다.” 또는 “나는 지금 이 대화를 가볍게 처리한다.” 같은 태도를 얼굴에 장착하는 셈이었다. 무심한 여인 (L’Indifférente)은 제목부터가 태도(affect)를 나타낸다. 점패치가 수행하는 것이 바로 “태도의 표면화”이기 때문에, 이 곡은 패치의 정치성을 가장 우아하게 음악으로 번역한 곡이라 할 수 있다. 곡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억양(프레이징)은 서로의 대화가 비켜 가는 모습이며, 종지부를 띡지 않고 살짝 옆으로 빠지는 듯한 종지부는 무심한 척하는 기술처럼 들린다. 이런 곡의 분위기는 당시 살롱을 찾은 이들이 미세한 표정으로 주고받는 암시를 읽어내며 들으면 좋은 곡이다. 4) 하이힐(Les talons hauts): 걷기 위한 신발이 아니라 “선별된 접근권”의 권력을 나타낸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의 하이힐은 기능적으로 불편할수록, 사회적으로 그 위상을 인정받는 데 유리하게 작동했다. 특히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굽이 높고 붉을수록 권력이 크다는 문법이 강하게 작동했고, 1670년경에는 귀족만 굽을 신을 수 있도록 제한하는 조치가 있었다. 당시 하이힐은 키를 키우는 도구이자, 바닥(거리·진흙·노동)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도구였다. 결국 “나는 땅 위를 걷지만, 땅의 규칙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시각적 선언이었다. 살롱에서 하이힐은 단순히 패션이 아니라 동선과 시선의 권력을 재편했다. 앉고 서는 자세, 인사 동작,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방식까지 살롱에서 대화의 무대 자체가 신발에 의해 조정되었다. 이런 하이힐의 권력을 잘 드러내는 곡이 바로 장-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의튀르크식 의식을 위한 행진곡 (Marche pour la Cérémonie des Turcs) 이다. 하이힐은 살롱에서 단순한 신발이 아니라, 왕실이나 상류사회에서 걷는 방식(보폭·자세·정지)을 하나의 계급적 형태로 바꾸는 장치였다. 행진곡 역시 그 자체로 몸의 리듬을 강제한다. 특히 륄리의 궁정 음악은 걸음과 의전을 설계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어, 하이힐의 정치성(불편을 견디며 우아함을 생산하는 몸)을 소리로 즉각 재현한다. 이 곡의 리듬은 가볍게 흐르는 것보다는, 마치 하이힐의 높은 굽이 바닥을 눌러 찍어 대며 리듬의 압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곡이다. 즉 음악이 사람을 일렬로 정렬시키는 느낌이 든다면 제대로 듣고 있는 것으로, 당시 의전이 펼쳐지는 공간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곡이다. 5) 화장품 보관함, 부아트 (La boîte) : 휴대가 가능하고 언제나 ‘자기 수정’과 ‘소지 자체가 소지자의 위신’을 대변한다 점패치·루주·브러시·거울을 담는 화장품 보관함 부아트(La boîte)는, 단지 수납이 아니라, 언제든 표면을 다시 정렬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살롱의 핵심 아이템이었다. 18세기 중엽 파리에서 고급 잡화·장식미술품을 기획·중개·조달하던 상인으로 활동한 라자르 뒤보 (Lazare Duvaux))는 로코코 시대 살롱과 궁정이 원하는 작고 정교한 사치를 기획·조달·큐레이션하던 핵심 인물로 그의 장부 기록(1748–1758)에 의하면 점패치와 루주 상자가 1755년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에게 공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1770년 혼인 예물함에 포함된 화장품 보관함과 보관함 속의 루즈 그리고 점패치(boîte-à-rouge et à mouches)가 고가(1,200리브르)였다 한다. 이런 상자는 꾸밈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선물·소유·취향의 정치학을 보여 주는 아이템이었다. 누가 어떤 상자를 갖고 있느냐는, 누가 어떤 네트워크에 접근 가능한지를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화장품 보관함 부아트(La boîte)는 하나의 오브제 안에 파우더, 루주, 패치, 브러시, 거울 같은 것을 넣을 수 있도록 작고 기능적인 칸들로 꾸며졌다. 이런 부아트(La boîte)의 모습이 연상되는 곡으로 쿠프랭(François Couperin)의 실내악 모음곡 결합한 취향들 (Les goûts-réünis)을 들 수 있다. 각각의 모음곡 한 곡 안에서도 짧은 악장에서도 곡의 성격이 연속적으로 바뀌며, 각 악장이 마치 뚜껑을 열어 칸을 하나씩 꺼내는 느낌을 만든다. 쿠프랭의 모음곡은 살롱에서 소지품을 열어 보여 주는 행위(자기 연출·취향 과시)와 구조적으로 닮아있다. 악장이 바뀔 때마다 부아트(La boîte) 속 다른 칸이 열리는 듯한 성격 전환, 우아함과 단정함 그리고 가벼운 재치가 느껴지며, 부아트(La boîte)란 오브제의 세공처럼 정교한 디테일이 프랑스식 장식음과 균형감을 통해 발산하는 곡이다. 6) 향수(Le parfum): 보이지 않게 공간을 점유하는 ‘후각의 의전’ 살롱 문화에서 향수는 개인의 향만이 아니라 공간의 향(공기의 편집)이었다. 당시는 바깥의 신선한 공기가 의심스러워 창문을 닫고, 포푸리(pot-pourri) 즉 향기 용기를 통해 실내 공기를 향으로 채우는 관습이 있었다. 베르사유 자료에 의하면, 18세기 궁정에서 향수와 메이크업이 필수품이 되었고, 루이 15세 치세에는 매일 다른 향을 착용할 정도로 향기로운 궁정(perfumed court)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향 분말·포마드·화장품·향수·향수 물 등이 옷장과 치장 품의 핵심이었다 적고 있다. 당시 향수는 매우 정치적 역할로 기능을 했다. 왜냐하면 향은 말보다 빨리 기억을 호하기 때문이다. 살롱에서 특정 향은 특정 인물·가문·파벌을 연상시키는 후각적 서명으로, 한마디로 기억의 정치화였다. 그리고 향은 공간을 점유한다. 시각은 시선을 돌리면 끝나지만, 냄새는 방 전체를 장악한다. 살롱이 대화가 이루어지는 극장이라면, 향수는 관객의 감각적 반응을 미리 유도하고 조율하는 무대 장치였다. 즉 향수는 살롱에서 단지 좋은 냄새가 아니라, 공기까지 정치적 편집의 대상이었다. 시선을 피하면 끝나는 장식과 달리, 향은 방 전체에 퍼져 공간의 분위기·거리·대화의 온도 등 모든 요소를 조율할 수 있었다.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의 사계(Le quattro stagioni) 중 겨울(L’inverno) 1악장 알레그로 논 몰토(Allegro non molto)는 바로 이런 공기를 음악적 움직임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향의 핵심은 잔향과 향의 확산인데, 겨울 1악장의 음형은 따뜻하게 번지기보다 날카롭게 흩어지고 사라지며, 다시 재등장한다. 이는 향이 피부 위에 한 번에 내려앉아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롱에 모인 이들의 움직임과 체온,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옷감에 따라 미세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겨울 1악장은 또 한편으로는 그 향의 음형이 선명한 깨끗함과 절제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혁명을 예상이라도 하듯이 긴장감을 유도하고 전달한다. 겨울 1악장은 향수의 정치성을 쾌락이 아닌 통제의 방향으로 읽게 해준다. 즉, 이 곡은 향으로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는, 향을 확산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향으로 공기를 정돈하고 태도를 규정하는 쪽에 가까워, 듣는 이들을 살벌하게 제압하는 빠르고 날카로운 음형이 압권이다. 빠른 반복 음형과 날 선 리듬은 향이 공기 중에 퍼질 때의 입자감이라기보다, 차가운 공기가 폐로 들어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당시 살롱에서 향수는 거리를 관리했다. 가까이 오면 더 진하고, 멀어지면 희미해졌다. 이 1악장은 그러한 거리의 변동을 청각적으로 구현한다. 즉 멜로디를 따라가기보다, 현악의 반복이 만드는 공간의 결(텍스처)을 공기 자체로 인식해 들으면, 갖가지 향들의 확산이 한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곡이다. “오늘날 살롱 음악회에서 바로크·로코코 음악의 효과적 감상법?” 현대의 살롱 음악회에서 쿠프랭·라모·텔레만·비발디 등 바로크·로코코 레퍼토리를 듣는 행위는, 단지 과거의 소리를 현재에 재현하는 일에서 끝나지 않아야 한다. 바로크·로코코 레퍼토리만큼 잘못된 방향성으로 접근하면, 백색소음이 될 확률이 높은 레퍼토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방향성 중 하나는 당시 살롱은 원래 부·교양·지위의 전시장이었고, 그 전시는 음악과 함께 운영되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따라서 강렬한 효과의 바로크·로코코 음악의 재생산은, 당시 살롱의 가구 배치와 동선이 갖는 의미, 그리고 당시 화장품·향수 등의 뷰티의 도구들을 당시 음악과 잘 접목해 음악을 둘러싼 섬세하고 세밀하게 조작된 감각·동선·기호를 현대의 살롱에서도 세밀하게 설계할 때 더욱 매혹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크·로코코 시대 음악 레퍼토리를 표면(투알레트, toilette), 공기(향), 기호(점패치), 동선(거구와 하이힐의 정치성) 등을 고려하고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관객은 바로크·로코코를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작동시킨 권력과 쾌락 그리고 유희의 미학을 몸으로 그리고 공기로 그 음의 결들로 색다르게 경험하게 된다.

[박선아 칼럼] 치유받는 음악,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

인간은 어떻게 절망 속에서도 살아남는가: '견뎌지는' 음악

[박선아 칼럼] 치유받는 음악,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

K-Classic News 오형석 기자 | 여러분은 살면서 길고 불편한 음악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떤 교향곡은 음악사 속에 작품으로 남고, 어떤 교향곡은 인간의 기억 속에 사건으로 남는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는 분명 후자에 속한다. 이 작품은 한 작곡가의 예술적 성취를 넘어, 극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음악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드문 사례다. 오늘날 이 교향곡을 다시 마주하는 일은 단순한 작품 분석을 넘어, 음악이 인간의 생존과 어떤 방식으로 맞닿아 있는지를 성찰하는 작업이 된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은 흔히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범주로 설명되기 어렵다. 이 작품은 미학적 쾌를 제공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쓰인 음악이다. 이 교향곡을 듣는 경험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존엄을 동시에 직면하는 시간에 가깝다. 연주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레닌그라드'는 결코 친절한 작품이 아니다. 긴 연주 시간, 반복적으로 누적되는 구조, 극단적인 다이내믹 대비는 연주자에게 지속적인 체력과 고도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난이도는 음표나 기교에 있지 않다. 이 교향곡은 연주자의 심리적 태도와 해석의 윤리를 시험하는 작품이다. 지휘자와 연주자는 이 음악 앞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들리게 할 것인가”보다 먼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해석이 과도해지면 음악은 선동적으로 변하고, 지나친 절제는 오히려 무기력한 인상을 남긴다. 이 작품은 해석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즉각적으로 진실성을 잃는다. 1941년,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봉쇄했다. 약 900일에 걸친 고립 속에서 도시는 굶주림과 추위, 끊임없는 폭격에 노출되었고, 하루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바로 이 시기에 교향곡 제7번의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훗날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기록했다." 이 말은 이 교향곡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열쇠다. ■지휘자의 역할 ― 통제보다 '버팀'의 미학 이 교향곡에서 지휘자는 결코 영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과장된 제스처나 극적인 템포 조절, 과도한 감정의 개입은 오히려 음악의 본질을 훼손한다. '레닌그라드'가 요구하는 지휘자의 핵심 덕목은 통제력이 아니라 인내력이다. 특히 1악장의 이른바 '침공 주제'는 지휘자의 윤리적 판단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 반복적 주제는 쉽게 과장될 위험을 안고 있다. 템포를 밀어붙이거나 클라이맥스를 과도하게 부풀리면, 이 음악은 군사적 행진곡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가 그린 것은 군대가 아니라 '침식'이다. 공포는 돌연히 들이닥치지 않는다. 그것은 서서히, 그러나 되돌릴 수 없게 인간의 내면에 스며든다. 지휘자는 이 반복을 견뎌야 한다. 참아야 하고, 기다려야 하며, 음악이 스스로 불안을 축적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훌륭한 지휘일수록 청중은 "지휘가 뛰어났다"는 인상보다 "음악이 나를 압도했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 ■템포와 시간 감각 ― 이 작품은 ‘흐르지 않는다’ '레닌그라드'에서 시간은 전통적 교향곡처럼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는다. 특히 1악장은 진행된다기보다 누적된다. 이 특성을 인식하지 못한 템포 운용은 구조 자체를 무너뜨린다. 느린 악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감정에 기대어 템포를 늘이거나 루바토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음악은 애도가 아니라 감상으로 변질된다. 쇼스타코비치의 느림은 서정이 아니라 정지에 가까운 ‘버팀’이다. 지휘자는 시간을 늘이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붙잡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케스트라 연주자의 경험 ― 소리 이전의 체력과 정신 연주자에게 이 교향곡은 물리적으로도 혹독하다. 현악기는 긴 지속음과 반복 패턴 속에서 근육을 소모하고, 관악기는 극단적인 음량 대비 속에서도 음정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금관과 타악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요구받지만, 그 폭발은 결코 감정의 분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작품에서 감정은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연주자의 역할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지 않다. 구조를 무너지지 않게 끝까지 유지하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연주자는 자신의 자아를 끊임없이 지워야 한다. 개인적 표현 욕구를 억제하고, 전체 구조 안에 자신을 봉인하는 일—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의 진실성이 발생한다. ■현악 ― 말하지 않는 증언자 현악 파트는 이 교향곡에서 노래하는 주체라기보다 증언자의 위치에 가깝다. 선율은 많지만,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말해지지 못한 감정, 삼켜진 울음에 가깝다. 비브라토의 사용 역시 극도로 절제되어야 한다. 과도한 비브라토는 감정의 과잉을 낳고, 이는 이 음악의 윤리를 훼손한다. 이 작품에서 좋은 연주는 감정이 느껴지되, 감정이 노출되지 않는다. 현악 연주자는 표현을 줄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게 된다. ■금관과 타악 ― 힘이 아니라 무게 금관과 타악은 종종 이 교향곡의 ‘전쟁성’을 담당하는 파트로 오해된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공격이 아니라 압박이다. 소리는 강하지만, 그 강함은 폭력이라기보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가깝다. 특히 타악기의 반복 리듬은 리듬적 정확성 이상으로 정신적 안정성을 요구한다. 단 한 번의 흔들림이 전체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리듬은 주목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포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다. ■리허설의 윤리 ― ‘잘 연주’보다 ‘올바른 접근’ 이 작품의 리허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적 완성도가 아니다. 물론 정확성은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주자 전체가 이 음악이 요구하는 태도를 공유하는 것이다. 지휘자는 리허설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소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여기서 감정은 더해져야 하는가, 혹은 덜어내야 하는가. 이 지점은 진짜 클라이맥스인가, 아니면 착각인가. 이 질문들이 공유될 때,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연주 집단을 넘어 하나의 ‘증언 공동체’가 된다. ■연주한다는 것의 의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7번을 연주한다는 것은, 단지 어려운 작품을 완주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존엄을 지켜왔는지를 몸으로 통과하는 경험이다. 이 교향곡은 연주자를 빛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주자를 비운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질문을 남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에도, 이 소리를 끝까지 붙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는 순간, 연주자는 비로소 이 음악의 일부가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각자의 봉쇄를 경험한다. 상실과 질병, 관계의 붕괴, 고립과 불안. 우리는 각자 나름의 레닌그라드에 갇혀 살아간다. 이때 이 음악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한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승리라고.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고, 그 의미로 자신을 지켜낸다고. 필자의 지인도 이야기를 했다. 본인 스스로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나에게 마치 그 말이 절망이라는 900일 봉쇄같이 들렸다. 아직도 터널속에 갇힌 것 같다고...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그에게 실제 레닌그라드 음악이 내면을 통과하는 음악으로 존재적 회복을 돕는 사례를 보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겠지만 존재적 회복을 돕는, 무너지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린 명곡아닌가. 그래서 '레닌그라드'는 전쟁의 음악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 내면치유의 음악이다. 무너지는 세계 한가운데서도 인간은 서로를 향해 귀를 기울였고, 그 순간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남았다. 모든 말이 무너질 때, 음악은 마지막까지 남아 인간에게 말한다. "너는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러나 일부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누구나에게 같은 효과가 있다고 검증되지 않았다. 필자에게 레닌그라드 음악이 불편했던 이유는 아마 인간의 현실이 불편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 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내는 인간의 시간을 그대로 닮은 교향곡이기에 인간의 절망속에서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내면 치유의 음악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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