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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경 율모이] 《여인의 삶과 사랑 I 프리뷰》 예술로 발효된 시간, 모녀의 시와 노래

시대를 횡단하며 여성의 언어와 정서를 예술로 환원

K-Classic News 노유경 평론가 기자 |

[노유경 율모이]

《여인의 삶과 사랑 I 프리뷰》

예술로 발효된 시간, 모녀의 시와 노래

2025년 10월 23일 19:30 Prugio Art Hall

정가: 강권순, 장명서

가야금: 이지영, 윤하영

첼로: 이호찬

 

《여인의 삶과 사랑 I》 – 여성의 목소리, 세월을 건너 음악으로

시간의 발효처럼 긴 여정을 거쳐 시(詩)의 언어가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다. 2025년 10월 23일작곡가 임준희의 작곡 발표회 《여인의 삶과사랑 I》이 서울 푸르지오 아트홀에서 개최된다. 40여 년에 걸쳐 한국 전통음악의 미학을 현대 음악어법과 접목해 온 작곡가 임준희는, 이번무대를 통해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성 시인들의 시어(詩語)에 새로운 음악적 호흡을 불어넣는다. 단순한 과거의 회귀가아니라, 시대를 횡단하며 여성의 언어와 정서를 예술로 환원하는 이 무대는 한국 창작음악의 시적 상상력과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는 중대한 시도로 평가될 수 있다.

 

엄마의 기도, 예술의 뿌리

“‘엄마’,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임준희에게 이 말은 단순한 혈연을 넘어 예술의 원천이었다. 그는 어머니 김경희를 “소박하고 겸손하며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분… 딸인 자신에게 하늘의 소리 비법을 알게 해 달라고 매일 새벽 기도해 주시던, 내 영감의 원천이자 생의 활력”이라고 회고한다. 실제로 어머니 김경희(1929–2002)는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경기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시인의 꿈을 이어간 국어교사였다. 딸이 ‘하늘의 소리의 비법’을 깨우치길 바라며 새벽마다 기도해 주었고, 세상에서 딸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1998년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어머니의 시에 곡을 붙인 합창곡 〈아, 동방의 아침나라〉가 연주되어 모녀가 함께 빚어낸 예술의 순간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임준희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와 이별해야 했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 속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 음악으로 무슨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까?” 삶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닌 곡을 쓰겠다는 다짐이 그때부터 솟아났다. 그리고 그 결심은 그를 자신의 뿌리인 전통음악의 세계로 한층 더 깊이 이끌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소설가 최명희(1947–1998)의 대하소설 『혼불』을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어머니를 잃은 딸이 한 권의 문학 작품 속에서 또 다른 어머니의 목소리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문학과 기억의 숙성: 시간 속에서 태어나는 음악

 

최명희는 17년간 혼을 불살라 원고지 12,000여 장 분량의 소설 『혼불』을 잉태해냈다. 그 소설 속에는 편안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한과 설움을 안은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그 강인하고도 애달픈 여인들의 서사가 임준희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는 마침내 이 방대한 문학을 소리로 청각화하기로 결심한다. 임준희는 『혼불』의 핵심을 자신의 작품의 '자궁' 속에 정착시켜 자식처럼 길러내겠다는 각오로 작곡 작업에 몰두했다. 2002년 첫 악상이 움튼 혼불 연작은 22년의 세월 동안 8개의 작품으로 자라나 현재 소설 4부까지 음악으로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마지막 5부를 앞두고, 주변에서는 임준희를 가리켜 “혼불 작곡가”라고 부를 정도가 되었다. 소설가가 17년에 걸쳐 한 작품을 탄생시켰다면, 작곡가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 혼과 불씨를 되살피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혼불 8 – 맥(脈)》 초연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녀는 생명의 원리를 따라 맥의 숨결을 음악 속에서 길어 올렸다. 최명희의 문장에서 울리는 맥박이, 임준희의 태평소에서 다시 뛰기 시작한 순간, 우리는 과거로 가는 길을 허락받는다.” 이처럼 문학과 음악의 시간은 서로를 발효시키며, 삶과 예술을 잇는 맥으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문학적 오래 익힘이 임준희 창작의 한 축을 이룬다는 점이다. 임준희 스스로도 “문학을 했던 어머니 덕분에 사실은 어렸을 적부터 작곡가보다는 작가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다”고 고백할 만큼, 그의 예술세계에는 문학이 깊숙이 자리해 있다. 그의 작곡 습관역시 ‘발효’와 닮아 있다. 풀리지 않은 음악적 숙제를 머릿속에 넣고 하룻밤 자고 나면 아침에 답을 얻곤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기억과 시간이 긴 호흡으로 숙성시킨 음악은 더욱 깊고 진한 울림을 지니게 마련이다.

 

전통의 숨결, 현대의 언어

 

임준희는 전통 가곡의 고유한 미감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작곡가다. 그는 가곡 특유의 깊은 농담과 변화무쌍한 시김새 등 전통 성악 기법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각 시어의 정서에 따라 다채롭고 신선한 현대 음악어법을 과감히 접목한다. 이러한 접근은 “여성 예술가들의 시대를 초월한 불멸의 예술혼과 빼어난 미적 감성”을 오늘의 무대에서 재조명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임준희는 아울러 여성 예술적 감성이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던 불운한 시대에 남겨진 주옥같은 시편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여인의 섬세한 감성과 독특한 상상력, 삶의 체험으로 버무려진 시적 언어를 음악으로 표현함으로써, 시대를 넘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하고자한 것이다.

 

이번 공연에는 이러한 뜻을 구현하기 위해 세대를 아우르는 연주진이 참여한다. 정가의 강권순 명창은 2002년 작곡된 임준희의 《달하》 초연부터 함께하며 정가의 서사성과 감성을 구현해왔고, 가야금의 이지영 교수는 2008년 《댄싱 산조 I》 초연을 포함해 임 작곡가의 주요 창작 작품들에 깊이 관여해왔다. 정가의 장명서는  《여인의 삶과 사랑 I》의 세계 초연 정가곡에서 주역으로 참여하고, 가야금의 윤하영은 교육형 공연과 창작 음악회활동을 통해 이번 무대에 발탁되었다. 첼리스트 이호찬은 유럽 유학 및 창작 음악제 경력을 바탕으로 이번 공연에서 전통 성악과 현대 악기 간 조화를 실험한다. 이처럼 원로와 신예가 함께 꾸리는 하모니는 한국 창작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기점이 될 것이다.

 

프로그램 하이라이트: 시대를 잇는 노래들

 

이번 발표회의 프로그램은 각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들의 언어를 노래로 풀어낸 작품들로 짜여 있다. 조선시대의 두 여류 시인 황진이(1506~1567)와 허난설헌(1563~1589)은 삶의 궤적도 표현 방식도 달랐지만, 당대의 제약을 뛰어넘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시로 남긴 공통점이 있다. 황진이는 기녀 신분으로서 세속을 초월한 자유분방한 예술혼을 불태우며 사랑과 인생을 노래했고, 허난설헌은 명문가 규수로 겪은 한과 그리움을 서정적인 한시(漢詩)에 담아냈다. 임준희는 이 두 시인의 작품을 노래로 불러내어, 시대를 앞서간 그들의 정서를 음악으로 되살린다.

 

황진이의 시에 의한 두 개의 노래, 〈상사몽〉(相思夢)과 〈월하오동진〉(月下梧桐盡)은 이번 공연에서 세계 초연으로 울려 퍼질 예정이다. 상사몽("그리워하는 이의 꿈")은 황진이가 노래한 애틋한 사랑의 정한(情恨)을 담은 시이고, 월하오동진("달 아래 오동나무 잎이 다 지네")은 가을밤 떨어지는 오동잎에 비유하여 덧없음과 회한을 읊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수백 년 전 한문 시구에 맺힌 이러한 정서는 임준희의 선율을 통해 현대 청중에게도 생생하게 전달될 것이다.

 

한편 허난설헌의 시를 바탕으로 한 세 개의 노래—〈춘우〉(春雨), 〈채련곡〉(采蓮曲), 〈몽유광상산시〉(夢遊廣桑山詩)—도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다. '봄비'를 뜻하는 춘우와 '연꽃을 채취하는 노래'라는 뜻의 채련곡 등 제목에서 짐작되듯, 허난설헌의 작품들은 자연 속에 투영된 여성의 섬세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 많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자식들의 요절과 자신의 병약함 등 비극을 겪었지만, 뛰어난 시재(詩才)로 당대 최고 수준의 한시들을 남겼다. 임준희는 이 한시들에 깃든 한과 희망의 정서를 전통 성악과 기악의 어법으로 포착해내어, 서정적 선율로 형상화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 시인 신갑순(1937~ )의 시 세계도 노래로 태어난다. 〈침향〉(沈香)과 〈갈대와 여인〉—두 개의 노래로 엮인 이 작품들에서는 원로 여류시인이 평생 바라본 삶의 애환이 독특한 상징으로 승화되어 있다. 침향(베어든 향기)은 긴 세월 가라앉은 기억의 향을 떠올리게 하고, 갈대와 여인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 투영된 어느 여인의 내면을 노래한 시로 알려져 있다. 임준희는 이러한 현대시의 언어를 전통 가곡과 실내악의 앙상블로 풀어냄으로써, 과거의 정서와 현대의 음악이 만나는 가교를 놓는다.

 

무엇보다도 이번 공연의 백미로 기대되는 것은 작곡가의 어머니, 고 김경희 시인의 유고시에 곡을 붙인 〈자화상〉이다. 〈그리운 동심아〉, 〈침략전쟁 수레바퀴 밑에서〉, 〈내 생애의 남루한 빈 잔, 넉넉한 손길로 채우소서〉—총 세 편의 유고시에 작곡된 연가곡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이번 무대에서 초연된다. 딸 임준희에게 영감을 주었던 시인 김경희의 시혼(詩魂)이 이제 딸의 선율을 입고 되살아나는 가슴 뜨거운 순간이 될 것이다. 세 편의 시에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순수에 대한 그리움, 침략전쟁의 소용돌이에 짓밟힌 삶의 고통, 그리고 허무한 생의 빈잔을 사랑으로 채우고 싶은 간절한 바람까지, 한 여성의 일생을 관통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를 통해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는 깊은 삶의 메시지가 관객에게 전해질 것이다. 작곡가 개인에게 가장 각별한 의미를 지닌 이 모녀의 작품은 이번 음악회의 정서적 정점으로 자리매김하리라 예상된다. 페터 한트케는 자살한 어머니의 삶을 글로 지켜내고자 《슬픔의 너머(Wunschloses Unglück)》를 썼고, 브람스는 어머니를 잃은 충격 속에서 《독일 레퀴엠》을 작곡했다. 두 예술가 모두 어머니를 단순한 기억의 대상이 아닌, 창작의 기원으로 되새기며 언어와 선율을 통해 사라진 존재와 다시 연결되고자 했다. 임준희의 연가곡 《자화상》 또한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혼(詩魂)을 딸의 선율로 되살리는 작업으로, 예술을 통한 모녀 간 대화이자 사랑의 궁극적 회복을 꿈꾸는 음악적 단상이다.

 

 

시간과 사랑: 이어지는 목소리

사랑과 그리움의 서사는 모녀(母女)의 관계에서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는 딸 페르세포네를 잃은 슬픔에 온 세상을 겨울로 얼어붙게 만들고, 딸이 돌아오는 순간에야 비로소 대지에 봄을 되찾아주었다. 이렇듯 엄마와 딸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은 계절마저 바꿀 만큼 깊고도 보편적인 힘을 지녔다.

 

임준희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도 그러한 운명의 유대가 흐르고 있다. 비록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어머니 김경희의 목소리는 딸의가슴 속과 작품 속에 면면히 흐르는 중이다. 그리고 이번 《여인의 삶과 사랑 I》을 통해 여러 시대를 살아간 어머니들과 딸들의 목소리가 한무대에서 어우러질 준비를 하고 있다. 시대와 공간을 넘어 공명하는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 그 한(恨)과 사랑의 정서는 새롭게 태어난 음악의 숨결을 얻어 오늘 우리의 가슴에 다가올 것이다. 비록 필자는 이 공연의 현장에 함께하지 못하지만, 먼 자리에서 그 울림을 마음 깊이 기다리고 있다. 몇 세기를 건너 발효된 기억과 시어들이 임준희의 선율을 타고 흐를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는 메시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시간의 강을 건너온 여인들의 노래가 이 가을 우리 가슴에 잔잔한 떨림을 전해주기를 기대한다.

 

 

글: 노유경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음악학박사, 쾰른대학교 출강, 국제독일교류협회 대표, 해금앙상블(K-Yul) 음악감독 겸 단장,  

Ynhovon1@uni-koeln.de ,인스타그램: Hangulmanse, kyul-germany, www.kyul.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