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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석의 달 항아리 연작시 프로젝트(5)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회상

 

그날인가, 그날이었던가?
앞마당 대추나무에 달빛 걸렸는데
지금은 고요하구나
홀로 서성이는 마음 하나

 

그날인가, 그 날이었던가?
잔치상 풍악 소리에
풍채도 좋은 대들보 흥겨웠으리

 

흐르는 것은 모두가
잠깐 이라더니
누렁이 하나 앞 마당을 지키네

 

심한 가뭄들어 땅들이
끙끙 앓을 때
정한수 두 손 모아 하늘을 향했던 날이

 

님 떠난 돌담길에 눈은 쌓이는데
품 좋은 달항아리 창밖을 응시하는구나 

 

매화가 오지 않았으니
새들인들 노래하랴

 

스치는 건 모두 외롭다더니
싸리문에 걸린 바람도 그러하구나

(2025. 7. 15)

 

《회상》 시평

 

이 시는 과거의 풍경과 정서를 되짚으며, 상실과 고요 속에서 되살아나는 기억의 울림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첫 행 “그날인가, 그날이던가?”라는 반복은 회상의 출발점이자, 시간의 실체를 붙잡으려는 시인의 애틋한 마음을 드러낸다. 마치 시간의 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하나의 장면처럼, 대추나무에 걸린 달빛이 시의 공간적 중심을 형성하며 독자를 시인의 내면으로 끌어들인다.

 

과거의 잔치와 풍악, 그리고 “풍채 좋은 대들보”는 활기찼던 시절의 삶을 떠오르게 하지만, 그것은 “지금은 고요하구나”라는 대조적 진술을 통해 상실의 정서를 강화한다. 삶의 흐름이 덧없고 찰나적임을 “흐르는 것은 모두가 / 잠깐 이라더니”라는 시구로 명징하게 제시하면서, 현재는 오직 늙은 개 ‘누렁이’만이 과거의 터를 지키는 시간의 정적 속에 놓인다.

 

중간부의 “심한 가뭄들어 땅들이 / 끙끙 앓을 때 / 정한수 두 손 모아 하늘을 향했던 날이”라는 부분은 공동체적 염원과 기원이 담긴 이미지로, 인간의 삶과 자연의 순환, 고통과 희망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농경사회의 풍경을 넘어, 간절한 바람과 기원의 정서로 확장된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는 점차 쓸쓸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띠며 감정이 침잠한다. “님 떠난 돌담길”과 “품 좋은 달항아리”는 실존적 빈자리와 기억의 그릇을 상징하며, 이별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시간의 흔적, 그리고 그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정서적 여운을 보여준다.

 

“매화가 오지 않았으니 / 새들인들 노래하랴”는 시인의 정한(情恨)이 압축된 구절이다. 봄의 상징인 매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희망이나 환희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을 뜻하며, 새들조차 노래하지 않는 정적은 슬픔의 침묵과 상통한다. 마지막 구절 “싸리문에 걸린 바람도 그러하구나”는 이 모든 감정과 정서를 외부 세계에까지 확장시키며, 자연마저도 시인의 외로움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감각적 공명을 이끌어낸다.

 

총평
『회상』은 시인이 과거의 풍경 속에서 현재의 고요와 쓸쓸함을 되새기며, 존재의 내면을 정갈하게 응시한 작품이다. 달항아리, 정한수, 대들보, 싸리문 등 한국적 정서와 공간 이미지들이 깊은 정감 속에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안에 깃든 상실과 기다림, 자연과 삶의 순환적 통찰은 K-Classic 시적 정서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이 시는 감정이 결코 과잉되지 않고, 절제된 언어 속에서 오히려 더욱 큰 울림을 전하는, '여백의 시학'이 살아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