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장혜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한국피아노학회 이사장)과 3회(6월 16, 23, 30일)에 걸친 8시간의 대장정 영상채록을 마치고
실로 인간의 욕망은 다양하다. 나이와 시대, 처한 환경에 따라 꿈과 욕망이 바뀌지만, 한 가지만큼은 누구나 공유한다. “영원히 잊히지 않고 싶다”는 열망이다. 고대인들은 하늘에 닿으려 바벨탑을 쌓았고, 파라오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다. 이집트 사막에 솟은 스핑크스, 근대 도시 여기저기서 솟구친 기념탑, 선조의 묘 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를 따졌던 조상들의 고심…. 모두가 “기억”을 현실에 새기려는 몸부림이었다.
종이의 시대가 가고, 영상이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욕망은 새로운 형식을 얻었다. HD와 4K를 넘어 8K까지 등장한 지금, 사람들은 납골당보다 ‘영상기록관’을 꿈꾼다. 살아 있을 때의 목소리·눈빛·숨결을 가족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생의 의미가 한 겹 더 두터워지지 않을까.
대한민국예술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은 일찍이 대가(大家) 예술인의 삶과 예술세계를 영상으로 채록해 영구 보존하는 사업을 진행해 왔다. 그런데 이 거대한 물결은 이제 ‘동호인 예술 시대’로 확장되고 있다.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평범한 시민들이 가곡·성악·시·미술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결과물을 영상으로 남기려는 흐름이 거세다. 칠순·팔순 잔치에서 자서전 대신 ‘인생 다큐’를 상영하고, 손주 세대에게 예술적 유산을 선물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기록 없이는 기억도 없다
조선 후기 한 선비가 60년 동안 일기를 써서 오늘날 역사가들이 당시 생활사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개인의 일상적 기록은 시대의 귀중한 데이터가 된다. 그러나 텍스트만으로는 정서와 온기를 온전히 전하기 어렵다. 영상은 표정· 음성· 환경음을 한 번에 포괄해, ‘살아 있는 기록’이라는 차원을 더한다. 더욱이 AI 기반 아카이빙 기술 덕분에 영상 검색·편집·보존이 손쉽고 저렴해졌다.
당신의 오늘이 내일의 문화재다
이전 세대가 일간지 가십란으로만 남았던 일상을, 우리는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고품질로 기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의지다.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기록을 미루다 떠난 뒤에는 ‘후회’조차 역사 속에서 말이 없어진다.
영상채록은 단순한 추억 만들기가 아니다
첫째, ‘공적 기억’과 ‘사적 서사’를 연결해 준다. 전문 연구자들은 영상 속 작은 단서로 그 시대의 풍속·언어·경제 상황을 복원한다. 둘째, 세대 간 ‘정서적 인터페이스’가 된다. 글보다 영상이 익숙한 Z세대에게 조부모의 젊은 날을 보여 줄 수 있다. 셋째, ‘자기 성찰’의 거울이 된다. 삶의 궤적을 정돈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의 궤를 확인하고, 남은 시간을 설계할 지혜를 얻는다.
“남기는 순간, 영원은 시작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록의 민주화’다. 촬영 기획서 작성, 인터뷰 질문 설계, 저작권·초상권 체크, 클라우드 보관까지 도와주는 원스톱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방문화재단과 공공도서관도 지역 원로들의 구술 생애사·예술사 사업을 추진 중이다. 전문가가 촬영·편집을 도와주는 ‘인생 아카이빙 스튜디오’를 동호인이 적극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록은 개인이 “나를 기억해 달라”는 외침을 넘어 공동체가 “우리의 시간을 함께 보존하자”는 약속으로 확장돼야 한다. 거듭된 세대교체 속에서도 문화가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지려면, 우리는 오늘의 경험과 감정을 책임 있게 저장하고 공유해야 한다. 일상이 예술이 되는 시대, 예술은 기록으로써 다시 우리의 시간을 조명한다.
삶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리고 기록은, 예술이 시간 위에 새겨 놓은 영원의 각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