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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하이데거, 니이체를 넘어 우리 철학을 바로 세워야 바로 선 다

철학이 없으면 나라가 혼돈에 빠지고 국민들이 안정되지 않아

K-Classic News 박정진 철학자 |

 

양재동 시냇가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칸트

 

아직도 한국의 철학자들은 서구 학자들의 문서와 책들을 마치 성경을 읽듯이 창세기 몇 장 몇 줄 하듯이 문서 몇 번 몇 줄을 표기하면서 자신의 지식 자랑을 일삼는 데서 자기 임무를 다했다는 안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국 철학이 단순한 서양 철학의 전도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인이 아닌 종의 철학이다. 이는 마치 기독교 목사가 성경에 장절을 외치면서 설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서양 철학은 또 다른 서양 종교가 된 셈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이 유독 강한 탓일까? 우리는 외래 사상이나 문물이 들어오면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하는 척하다가 나중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무조건 받아들이고 숭배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한민족의 여성성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하이고 편견일까?

 

한국인은 외래 사상을 시시비비 따지기 전에 무조건 받아들이고 본다. 그리고 한 번 받아들인 것은 세상이 변해도 지키는 습성이 있다.

 

스스로 창조적 이성으로 생각하고 토론하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외래 문물은 국내에 들어와서는 쉽게 당파를 형성한다.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고 실질보다 허례 의식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의례는 의례적인 것이 되고 만다.

 

조선 중기의 주자 가례를 둘러싼 예송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오늘날도 권력, 지식인 사이에서 부지부식 간에 예송- 당파는 계속되고 있다. 한국인에게 당파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오늘날 철학자 가운데는 자신이 전공한 서양 철학자들을 선양하고 대변하는 것이 곧 철학하는 행위인 줄 착각하는 학자들이 많다.물론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기초, 공부나 훈련이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훈련이 철학하는 것은 아니다. 서양 철학의 짝짓기와 요약으로서는 진정한 철학자, 철학하는 사람이 될 수 없고, 동시에 인류를 구원할 철학도 내놓을 수가 없다. 

 

철학의 탄생도 철학자가 거주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자연 현상이다. 독일 철학은 독일 사람들의 삶과 앎의 일체이고, 프랑스 철학은 프랑스 사람들의 삶과 앎의 일체이고, 영국 철학은 영국 사람들의 삶과 앎의 일체이고, 그리고 미국 철학은 미국 사람들의 삶과 앎의 일체이다. 한국 철학은 한국 사람들의 삶과 암의 일체로서 탄생하여야 한다.


철학자들은 스스로의 사유 체계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여기에 도달한 사람만이 자신의 고유 철학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사유하지 않고 남의 사유를 마치 자신의 사유인 양 떠들어대고 남에게 빙이 되어 있으면서 철학자 행세를 하는 것은 시중에서 동양 철학관을 열어놓고 손님을 부르는 철학관, 철학보다 못한 행세인 것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철학하는 사람은 아직 한국에 없다.


앞으로 한국의 경제 서장에 걸맞은 자생 철학자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이 선진국으로 들어가느냐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철학 교수들이나 철학들의 사명이 크다. 철학의 힘은 국가의 힘과 관련이 있다. 인문학과 정신력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