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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경 3집 『푸른 벽을 세우다』

황금 작약이 흔들리며 가득 피다가

K-News 관리자 기자 |

 

 

석연경의 상상력은 장쾌하다. 그것은 히말라야의 설봉을 오르는 바람처럼 거침없고, 까마득한 공중에서 순식간에 지상으로 낙하하는 독수리처럼 망설임이 없다. 그의 상상력은 사람에서 사물로, 지상에서 하늘로, 식물에서 동물로, 홍진(紅塵)의 세상에서 화엄(華嚴)으로 막힘없이 오가며그 모든 대척점에 있는 것들의 거리를 지운다. 그의 상상력 안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허공이 되고, 가장 단단한 것이 가장 부드러운 것을 품을 때, 경계들은 무너지고 범주들은 파편화된다. 석연경에게 영원히 견고한 것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호(sign)가 켜켜이 오래 묵은 의미의 먼지들을 떨어낼 때, 주체가 욕망의 액세서리를 하나씩 버릴 때, 멀리서 천천히 흰 소처럼 그의 시가 온다. 그리하여 그의 시가 가는 길은 절벽 같다. 저 높은 곳에서 저 낮은 곳으로, 혹은 그 반대로, 주체가 급강하와 급상승을 반복하는 길이 절벽이다.

 

 절벽은 존재의 변이가 순식간에 일어나는 위태로운 공간이고, 절실한 변화의 장소이며, 단호한 결단과 절정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의 시의 발굽에는 ‘절벽’이라는 징이 박혀 있어서, 그가 움직이는 길마다 ‘절정’의 파열음이 울려 퍼진다. 이 시집의 도입부부터 마지막까지 자주 반복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절벽’이다. 그러므로 절벽은 그의 인식과 사유와 정동(情動 affect)이 지나가는 통로이며, 그의 시들은 절벽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백석) 절정에서 흩어져 내리는 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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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코끼리가 숲으로 사라집니다 당신을 지나온 빛줄기가 숲에 드니 상아가 긴 황금 작약이 옵니다 바람이 붑니다 황금 작약의 시간에 누가 성벽을 쌓나요 …(중략)…

절벽이 여럿 있는 바위산이 붉은 알을 품습니다 여린 싹 연두 구름 한 방울이 눈을 반짝이며 당신에게 오릅니다 쿵 가슴으로 쓰러진 구상나무를 일으켜 세웁니다 천둥소리를 내는 두꺼운 책이 자랍니다 책장은 연비를 새기는 칼날입니다.

 

  …(중략)… 황금 작약이 흔들리며 가득 피다가 입을 오므리는 동안 허공은 허공인 채 있습니다

불기둥을 숨긴 회오리 사이로 지나가는 붉은 절벽을 봅니다 당신의 따뜻한 몸을 만지고 향기를 맡습니다 씨앗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귀머거리와 광막한 세계를 꿰뚫어 보는 눈 먼 자 꽃비가 내립니다 머물던 바위가 코끼리 걸음으로 파도소리를 냅니다 예전 당신은 어디선가 피고 졌다가 익숙하고 낯선 풍경 새로운 당신이 옵니다  

 

황금 작약과 코끼리는 바위산을 오르는 허공입니다 당신을 너무 늦게 알거나 영영 모르거나 당신은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지금 여기 있습니다 영영 사라지는 것은 없어서 우연인 듯 황금 작약이 핍니다

―「허공, 황금 작약에게」 부분 

 

석연경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