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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시 100선] 엄마 걱정 - 기형도

A Better Me
판화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
그리움

 

K-Classic News 원종섭 詩 칼럼 |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1989 문학과지성사 기형도  「엄마 걱정」 

 

 

 

 

 

 

 

 

 

 

 

 

 

 

엄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 보다 엄마라는 호칭은 그 스스로 짠합니다

 

 

 

 

 

 

 

 

시인의 어머니와 가난했던 유년은 무서운 기억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공포보다 더 진한 감정은 그리움일 것입니다

 

 

 

 

 

그 공포는 아버지의 부재와도 관계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공포보다

더 진한 감정은 그리움일 것입니다

 

 

 

 

 

유년 시절의 추억, 동경, 고독

 

 

 

 

 

 

무섭고 외로웠던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기형도의 바람의 집 겨울 판화 1

 

 

 

 

 

 

어머니는 그것을 예견했던 것이지요.

판화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언제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드리워졌던 가난과 무서움 때문만이 아니라

'엄마'의 삶이 겹쳐서이기도 합니다

 

 

 

 

엄마 걱정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 대해

'왜 여태 안 오시지?' 하는 걱정스러운 기다림도 있겠지만,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에 대한

염려의 마음도 들어 있었을 것이며

 

어린 자식을 두고 시장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엄마의 자식에 대한 걱정도 담은 제목입니다.

 

 

 

 

 

기형도의 시들은 대부분 우울하고 어둡고, 외로움과 죽음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의 시의 어둠의 바탕은, 시의 내용상 일차적으로 유년의 가난함과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는 병으로 앓고 있고 대신 어머니가 일을 하고 누이가 공장에서 야근을 하는 환경에서도, 화자는 반장을 하고 상장을 받아오지만 그것들은 현실 속에서 무의미한 일들이 되고 맙니다  (「위험한 가계 1969」).

 

 

 

가난으로 마음까지 황폐해진 가족과 가까운 친지의 죽음은 화자를 더욱 어둠과 불안에 갇히게 합니다. 그 중에서도 ‘무능력한 아버지’는 기형도 시의 중요한 출발점이며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기도 합니다

-「너무 큰 등받이 의자」, 「물 속의 사막」

 

 

 

 

 

 

 

 

 

 

기형도  奇亨度

 

1960.  경기도 옹진군 송림면 연평리에서 아버지 기우민과 어머니 장옥순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64년 경기도 시흥군으로 이사해 서 현재 광명시에서 타계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수준이 남달랐고 노래와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습니다. 서울의 시흥초등학교·신림중학교·중앙고등학교로 통학하는 동안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고 다양한 예능 활동으로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한편으로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가계 전체가 가난하게 살게 된 일, 바로 위 누나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 안개가 많이 끼는 안양천이라는 주변 환경 등은 시인의 내면에 깊이 체화되었습니다.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에 입학하고 나중에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지만 대학 생활은 주로 ‘연세문학회’와 더불어 했습니다. 캠퍼스에서 합평과 토론을 이어가며 암울한 1980년대를 이겨냈습니다. 1981년 방위병으로 입대, 근무지인 안양 지역의 ‘수리시’ 동인에 참여했다. 이때 초기작 여러 편을 창작했습니다. 복학하고 부지런히 작품을 써서 기성문단에 투고하던 중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 가 당선되어 등단합니다.

 

 

 

졸업 전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이후 정치부·문화부·편집부 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이 무렵 ‘시운동’ 동인을 비롯해 많은 선후배 문우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습니다. 시집 발간을 준비하던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의 파고다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뇌졸중. 3월 9일, 천주교 수원교구 안성추모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같은 해 5월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이 출간되었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좀 나은 것은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시를 완성했다는 사실입니다

 

 

 

스물아홉 살, 어느 삼류 극장에 앉아 조용히 숨을 거둔,

그 짧은 여행의 마지막 눈빛은 어떠했을까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입속의 검은 잎 - 詩作 메모

 

 

 

 

 

 

 

 

 

 

 

 

 

 

 

 

 

 

이 변덕스러운 세상에서

 

당신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뜻밖의 능력자 입니다

 

 

 

 

원종섭   Won  Jong -Sup

시인,  영미시전공 교육학 박사, 대중예술 비평가  

K-Classic News 문화예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