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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클래식 역사 탐방]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4.5.-1916.8.6.) 누구인가?

라이프치히(Leipzig)에 있는 짐머만(Zimermann) 악기회사에서 사온 악기 52점으로

K-Classic News 탁계석 평론가  |

 

프란츠 에케르트 약력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4.5.~1916.8.6.)는 1852년 4월 5일 독일 프로이센 (Preußen)의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의 발덴부르크(Waldenburg) 노이로데(Neurode) 키르 헨스트라세(Kirchenstraße)에서 법원 서기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의 재능이 뛰어 나 브레슬라우(Breslau)와 드레스덴(Dresden) 음악학교에서 오보에를 배우고 17세에 나이세 (Neisse)의 육군군악대 병사로 입대하여 보조 오보에 연주자로 복무하였고 1876년 빌헬름스하 펜(Wilhelmshaven)에 있는 해군군악대로 옮겨가 수석 오보에 연주자로 복무한다.

 

23살이던 1875년 11월 17일 마틸데 후흐(Mathilde Huch)와 결혼하고 1879년 주일도쿄독일명 예영사 미카엘 마틴 베어(Michael Martin Baer)의 주선으로 초빙되어 1879년 3월 29일 단신으 로 일본에 도착, 해군군악대 교사로 부임하여 근무하던 중 1880년 7월 일본 국가제정 심의위원 으로 참여, 기미가요(君が代)를 작곡하여 1880년 11월 3일 메이지(明治) 일왕 탄생일 연회에서 첫 연주를 하고 1893년 8월 12일 국가로 제정된다. 한편 1883년 3월 2일부터는 3년간 음악취조괘(音樂取調掛)의 교수를 겸임하고 해군군악대를 퇴직한 후 궁내성 아악과 교사로 있었으며 1892년부터 1894년 4월까지 육군군악대에서 근무를 하고 1897년 3월부터 다시 해군군악대를 거쳐 1899년 3월 31일로 20년간 근무를 마치고 4월 19 일 요코하마(橫濱)를 떠나 프로이센으로 돌아간다.

 

다시 대한제국으로부터 군악대 창설과 그 지도를 위한 초청을 받고 3년 기한의 고빙(雇聘)을 수락하고 광무 4년(1900년) 12월 초 베를린을 떠나 광무 5년(1901년)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하자 이때 『The Korea Review(한국평론)』 2월호 뉴스일지(News Calendar)는 “대한제국 정부는 시위군악대(Imperial Band)를 조직한 프로이센 왕립 음악 감독 프란츠 에케 르트의 공헌으로 견고히 하였고 유사한 임무를 띠고 일본에서 20년간 고빙되어 있었던 그의 동 양에서의 오랜 경력은 한국인을 훈련하는 데 큰 가치가 될 것이며 한국인의 음악적 재능과 합치 면 훌륭한 군악대가 될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했다.

 

 

에케르트는 독일의 라이프치히(Leipzig)에 있는 짐머만(Zimermann) 악기회사에서 사 온 악 기 52점을 지금의 광화문 앞 정부서울청사 자리인 시위제2연대 제2대대 연병장에 포장을 풀어 놓고 기념 촬영을 하였으며 황제를 폐현(陛見)하기 위하여 독일영사 바이페르트(H. Weipert)가 외부로 조회하여 입국 후 한 달 만인 3월 19일 오후 5시에 바이페르트 영사와 함께 경운궁(덕수 궁)에서 광무황제 폐하를 폐현한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곧바로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나팔수나 고수(鼓手) 중에서 50명을 선발하 고 한성관립덕어학교 출신인 독일어 통역관 백우용(白禹鏞)을 뽑아 3월 1일부터 먼저 백우용을 가르치고 백우용이 다시 대원들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교육을 시작하여 3개월 동안 기초교육을 끝낸 후 성적이 우수한 자는 연주대로 나머지는 교육대로 분리하여 7월 초에는 50명 중 32명을 행사부대로 편성한다.

 

에케르트는 6개월 동안 교육을 하면서 황제의 생신인 만수성절(萬壽聖節)에 연주할 애국가를 작곡하기 위하여 거의 매일 백우용과 함께 교방사(敎坊司)를 드나들며 아악(雅樂)의 음악적 요 소를 파악하고 작곡하여 9월 7일 경운궁 경운당에서 각부 대신들과 각국 공영사(公領事) 및 외 국 신사들이 폐현한 후에 애국가와 기타 한 곡을 초연하였다. 이날 참석한 외교관들은 창설한 지 6개월밖에 안된 시위군악대의 훌륭한 연주 실력에 깜짝 놀라 공영사관들은 토요일에 열리는 파티에 초청하여 연주를 듣는 것이 가장 큰 즐거운 한때였고 인기가 대단하였다 한다. 

 

광무 6년(1902년) 1월 27일 황제께서 ‘대한제국애국가를 만들어라’라는 조령을 내리자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을 하고 문관이 작사하여 탁지부 전환국 인쇄과에서 7월 1일부로 발행하여 우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십여 개 국가에 배부를 하고 8월 15일 관보에 게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흠정(欽定) 국가가 된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가 발행이 되자 계약서에 따라 8월부터 시위기병대 소속의 군악 제2대를 또 조직하여 교육을 시킨다. 이어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고 진심으로 교육을 한 공로로 12월 20일 특별히 훈3등 태극장을 받는다. 시위군악대의 연주를 위한 음악당인 탑골공원 팔모정이 완공되자 광무 9년(1905년) 3월 16일 경 기함(旗艦) 퓌르스트 비스마르크(Fürst Bismarck)호의 독일 해군군악대 일행과 우리 정부 고위관리 각국 주재 공영사 그밖에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환연주가 열려 청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독일 해군과 같이 온 외국 기자들은 감탄하여 동양 순방 중에 가장 인상에 남고 특기할만한 점은 우수한 한국 군악대의 존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탑골공원 연주는 광무 10년(1906년) 6월 16일(토)에 열린 것이 보이며 10월 6일에는 ‘광무십 년기념연주’회가 팔모정에서 열리며 죽 이어져 융희 2년(1908년) 11월 11일까지 열린 기록이 보 이며 일제의 강점으로 연주가 중단되었다가 1913년 8월 31일부터 다시 이어져 1929년 4월 25일 봄까지 기록이 보인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광무 6년(1902년) 1월 3일 지금의 회현동1, 2가 일부인 숲이 울창한 남산 기슭 회동(會洞)에 살다가 회현동3가인 욱정(旭町) 3정목 황조곡(黃鳥谷)에서 부인과 셋 딸들과 함께 살면서 이왕직 양악대 음악교사로 재직하다가 1916년 1월 31일부로 해고되고 전 황실에서 위로금, 귀국 여비, 기념품비를 후하게 하사하여 그의 다년간 노고를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의 병이 깊어 8월 6일 오후 9시 반에 인후암으로 64세 4개월의 일기로 타계하여 장 례식은 8월 8일 8시 종현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 열리고 큰아들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Jr)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이날 매일신보는 ‘악계 은인의 장서 (長逝) 양악 발전의 은인’이라며 그에 관한 기사를 실었고 경성일보도 7, 8일 양일간에 걸쳐 보도 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대한제국 애국가 외에 광무 7년(1903년) 8월 8일 작곡한 봉헌곡(奉獻曲), 교 주만행진지곡(膠州灣行進之曲 Der Kiautschouer Humor Marsch), 결혼피로연 행진곡 엘리자 베트(Hochzeits Fest Marsch Elisabeth), 도쿄의 추억(Souvenir de Tokio), 오보에 독주(Oboe Solo)와 늘 기생이나 농부의 노래를 듣고 영감을 얻어 많은 작곡을 한 한국 민요에 의한 접속곡, 실내악곡 및 레코드판 등도 있었다. - 최창언(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