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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석학 이어령 전 장관을 추모하며

그가 남긴 천국의 비밀들이 그의 책과 문장 속에 있으니

K-Classic News  이백화  기자 |

 

 

 

이어령 전 장관을 추모하며

예술계에 남긴 족적과 천국의 열쇠

“동자부 장관, 당신이 그랬지요? 문화부에만 학교 만드는 특권주는 게 말이 되냐고. 좋아요. 당신이 어린애 낳았는데 그 애가 기저귀 찬 채로 ‘여기 파라’ 하면 석유 나오고 ‘저기 파라’ 그러면 가스 나오고, 그런 애가 있어요? 있다면 에너지 학교 만드세요. 


농림부 장관! 당신이 어린애 낳았는데 여섯 살도 안 된 애가 하루에 열 명이 심어야 할 모를 혼자 심으면 농림학교 만드세요. 그런데 문화영역에서는 네 살짜리 모차르트와 피카소가 나와서 ‘아버지, 그거 틀렸어요’ 하고 가르쳐요. 이런 천재들을 보통 애들처럼 길러서 대학 입학시키자고요? 그사이 아이는 다 망가져요.”(‘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1991년 12월 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그의 임기중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딱 5분간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의 당위성에 대한 짧은 스피치를 날렸다. 이 연설로 농림부 장관, 동자부 장관의 반대를 꺾고,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마침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는 ‘천재가 있으면 특별교육을 해야 한다’며 오히려 그 아이들은 불쌍한 아이들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기 전에 쓸모를 못 찾은 놈에게 눈곱 하나 떼서 불여 주면 그 아이가 ‘화가’가 되고, 귀지 좀 후벼서 넣어주면 그 아이가 ‘음악가’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너 세상 나가면 쓸모없다 조롱받을 테니, 내 눈곱으로 미술 해 먹어라. 너 세상 나가면 이상한 놈이라고 왕따 당할 테니 내 귀지로 음악해 먹어라.’ 이어령 선생은 그게 바로 예술가들로 이 재능마저 없다면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범죄자가 되니 자비를 베풀자고 역설했다. 그게 바로 이 아이들을 위한 예술학교를 짓는 일이라고 탁자를 쳤다. 이 짧은 5분의 강설은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 반대했던 장관들까지 모두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땅땅땅! 그렇게 한국예술종합학교는 탄생했다.

그로부터 탄생한 ‘5 minute kids’들은 지금 어떤가? 퀸엘리자베스콩쿠르 국가인 벨기에에서 조차도 한예종의 음악교육을 연구할 정도로 세계적인 학교가 되었고, 웬만한 국제콩쿠르는 식은죽먹기로 모두 석권하고 있다. 


‘시대의 지성’ 문화비평가 이어령 전 장관은 스스로 원해서 장관이 된 게 아니었다. 그는 학자로서 한국 문명과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수많은 저서와 강연으로 바빴던 학자였다.
1989년 말 문화공보부에서 ‘문화부’가 분리된 뒤 서울올림픽 개, 폐회식를 성공적으로 이끈 당시 이어령 교수를 어렵게 초빙해 장관으로 모신 것이다. 취임하자마자 문화부 관계자들에게 일성을 가했다. ‘나는 황야에 집을 지으러 온 목수다!’ 


이 전 장관은 10개년 청사진을 그렸고 그 밑그림을 토대로 이때부터 공무원들은 문화주의시대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쉴새 없이 일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예술영재를 본격적으로 키우기 위한 한예종 설립 추진이었다. 그러나 서울 시내에 문화부 산하 국립예술대학을 짓는 건 쉽지 않았다.

 

당시 신현웅 문화부 전 차관(현 웅진재단 이사장)에 의하면 교육부의 강력한 반대는 물론, 총무처와 예산 당국의 반대, 명문대 음대, 미대 연극영화 대학의 반대는 그야말로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지금은 한예종의 초대 총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서울대 교수 신분이었던 이강숙 교수도 반대 일선에 앞장섰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탄생에는 이 같은 비사가 있기에 이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이어령 전 장관의 별세(別世)는 예술인들에게 남다를 수밖에 없다. 사실 ‘예술가란 하늘에서는 크게 날개를 펼치는 알바트로스’라고 인식하는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 전 장관은 알바트로스는 그 거대한 날개로 하늘에서는 크게 날 수 있지만 땅에서는 날지 못해 바보새가 되는 것처럼 예술가들도 그렇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한쪽 날개로라도 날아보기 위해 언 손으로 소설을 쓰고, 휴지에라도 그림을 그리고, 악기만 있으면 달려들어 연주한다는 것 아닌가.

 

이어령 전 장관 역시 그런 반쪽 날개를 가진 알바트로스였다. 그러기에 오랜 기간동안 ‘죽음의 크랩’(crab)인 암과 고독과 칩거와 동거하면서도, 8대의 컴퓨터 모니터를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읽고 쓰면서 사상과 철학, 문학의 날개를 펼쳐왔다.

 

이 장관은 그의 음성이 담긴 마지막 수업에서 ‘떠내려 가는 건 사는게 아니’라고 했다. 살아있는 것들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고, 바람의 역풍을 거슬러 나르고, 잉어가 용문 협곡으로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된다고 했다. 설혹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지 않아도 살아있는 모든 것은 거슬러 원하는 곳으로 움직인다. 이 장관은 그렇게 호흡이 다하는 순간까지 배 내밀고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물고기로 살아냈다.

17세기 시인 앤드류 마블은 인생의 황혼에 대한 유명한 시를 지었다. ‘그러나 나는 등 뒤에서 듣는다. 시간이 날개 달린 전차처럼 달려오는 소리를...’ 이 장관도 이 무서운 시간의 전차소리를 들었을 터이지만, 그는 결코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기에 노마지지(老馬之智)의 끈을 놓지 않고 전심으로 살아가는 이어령 장관의 삶을 발견하고, 어느 청소년은 자살을 포기했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사회학자 칼 필레머는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이 알게 된다면’에서 ‘누구나 하나의 길에 서 있게 된다. 그 길에서 만약 빨리 뛸 수 없다면 더 천천히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은 시대의 지성이지만 그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도 ‘질문과 믿음’이라는 양 지팡이에 의지한 채 치열하게 살아왔다.

 

어쩌면 이 전 장관은 예술가의 태생적 한계와 왕따적 기질을 이해했던 마지막 문학가, 마지막 행정가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이어령 장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음악을 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춤을 추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으면 인생의 우물에서 아무것도 퍼 올리지 못하는 ‘바보들’을 이해한 최초이자 마지막 문화비평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저서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파 뿌리 이야기’를 풀이해 놓았다.

 

세상을 살면서 선행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인색한 노파가 지옥에 떨어졌다. 수호천사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워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래도 생전에 거지에게 파 한 뿌리를 준 적이 있으니 선처해달라고 했다. 하나님은 파 뿌리의 선행을 기억한다며 천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안도의 한숨을 쉰 노파는 파 뿌리를 잡고 지옥불을 빠져나오는데 다른 귀신들이 살려달라고 아귀다툼을 벌이며 달라붙었다. 순간 노파는 달려드는 그놈들의 손길을 밀쳐내며 소리질렀다.
“안돼! 이 파 뿌리는 내 것이야.” 파뿌리는 후드득 끊어지고 노파도 귀신들도 모두 지옥불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작가 김지수는 노파가 결국 지옥불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어쨌든 파 뿌리 하나의 선행이라도 신에게 구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네요.” 하고 말하자 이 장관은 이렇게 답한다. “끝까지 이기적일 것 같은 사람도 타인을 위해 파 뿌리 하나 정도는 나눠준다네. 그 정도의 양심은 꺼지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거든. 남을 위해 뭔가를 해주려는 마음이 인간에게는 있어.”

 

인간존재와 생명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앞서 예술가들은 이어령 장관에게 큰 빚을 지었다고 했다. 오늘의 한예종과 수많은 한국 영재들이 세계에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준 이어령 전 장관은 파 한 뿌리가 아니라 세상을 뒤흔들 만한 씨앗들을 너무도 많이 심어놓았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천사로 오르리라 확신한다.  


이제 그는 갔으나 그가 남긴 천국의 비밀들이 그의 책과 문장 속에 있으니 성경을 대하듯 그의 책을 두고두고 다시 읽어봐야 하리라. 이어령 전 장관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김종섭 (월간 리뷰 빌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