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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석 노트] 경계 밖에서 터지는 한 방

사회적 중심을 벗어난 창조적 에너지에 관하여

[탁계석 노트] 경계 밖에서 터지는 한 방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세상의 한 방은 경계 밖에서 나온다.’ 이 문장 하나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외를 두려워한다. 누구나 주류, 기득권에 편입돼 안정을 누리고 싶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말했을 때 그는 이미, 소속과 유대가 주는 혜택까지도 겨냥하고 있었다. 중심에 서면 권력, 자원, 명예가 뒤따르고, 경계 밖으로 밀려나면 결핍과 불안이 덮쳐 온다. 그러나 ‘경계 밖에는 경계가 없다.’ 이 어록은 소외의 빈 공간을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전환한다. 경계 밖의 자유, 창작자의 영토 경계 밖 1번지 사람들은 노숙자들 사회적 약자가 있지만 대체로 작가, 예술가다. 그들은 고립과 침묵 속에서 타인의 시선을 ‘음소거’(mute)한 뒤, 세계를 새 언어로 재편한다. ‘기억 파노라마’를 뚫고 나오는 그 순간, 기존 질서가 떠받친 안전지대는 와르르 무너지고, 대신 혁신의 지층이 드러난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로 귀족 사회의 허위를 부쉈듯,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 한 권으로 라 만차 평원의 ‘미친 기사’를 보편적 인간 희극으로 승화시켰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 역시 코펜하겐 한복판 하숙방에서 기존 교리와 합리주의를 조롱하며, 실존의 불안을 오늘의 화두로 남겼다. 주류에 편입되기보다 스스로 ‘경계’가 되기를 택한 이들의 선택은, 세월이 흘러 고전(古典)이라는 훈장으로 돌아왔다.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팔았다. 네덜란드의 외떨어진 아뜰리에에서, 프랑스 남부의 정신병원에서, 그는 줄곧 ‘경계 밖’의 거주자였다. 황량한 해바라기 밭과 나이트 까페를 물감 짙은 획으로 난도질하듯 그려내며, 그는 전통 회화의 선(線)과 면(面)을 거부했다. 고립 속에서 폭발한 강렬한 색채와 붓질은 훗날 ‘표현주의’라는 우산 이름으로 현대미술의 절대 좌표가 된다. 경계 밖에서 인식의 스펙트럼이 확장될 때, 예술은 기존 언어가 표현하지 못한 감각을 감당하게 된다. 에밀리 디킨슨 19세기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은 마을 애머스트에는 흰 옷만 입고 살던 여성 시인이 있었다. 에밀리 디킨슨은 생전에 시집 출간을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창문 밖보다 방 안의 ‘은밀한 우주’를 탐험한 그녀는 죽은 뒤에야 1,800여 편의 시로 세상과 조우한다. 날카로운 절제, 비유와 여백의 미학은 현대시의 새로운 좌표가 되었다. 경계 밖에서 내면의 음표를 끝까지 붙잡고 있었기에, 공시적(共時的) 진부함을 면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가능하다. 경계 밖이 던지는 통찰 질서 바깥의 무한성 중심은 규칙과 통제를 수호하지만, 경계 밖은 규칙 없음 자체를 재료로 삼는다. 이 무규정(無規定)이 곧 창조적 자양분이 된다. 타자(他者) 시선의 해방 소외는 관습적 평가의 사슬을 끊는다. 낙인이 ‘주문 불가’가 아니라 ‘주문 자유’로 뒤집히는 지점이다. 시간의 역설적 아군(我軍) 시대와 불화한 작품이라도,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중심이 밀려나고 경계가 재편된다. 그러면 한때 주변이던 작품이 도리어 표준이 된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중심으로 진입하라’는 호령을 듣는다. 더 촘촘한 네트워킹, 더 화려한 스펙, 더 많은 데이터. 그러나 경계 밖 1번지에서 발견되는 것은, 누구의 검증도 통과하지 않은 ‘원시의 자기’다. 항상 회전하는 지구본이 언젠가 고장 날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고장 난 이후에도 ‘어떤 방향’으로 굴릴지를 상상하는 일이 더 창의적이지 않은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읊조리던 그 밤, 그는 이미 중심 밖에 서 있었다. 바뤼흐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속삭인 자리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변두리 골목 마룻바닥이었다. 한 방을 꿈꾸는 이들에게 모두가 중심을 향해 질주하는 오늘,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경계 밖에서 살아남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소외는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지만, 동시에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경계 밖에는 진입 장벽도, 통행세도, 검열도 없다. 대신 실패에 대한 전권(全權)과, 실패를 실험으로 환치할 수 있는 자율이 주어진다. 그러니 주저 없이 기어코, 다시 한 번 지구본의 페달을 밟아 보자. 한 방은 어느 날 아주 조용히, 그러나 치명적인 파열음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경계 밖이 곧 혁신의 첫 주소지였음을, 지금은 우리가 그 실행을 옮겨야 할 때다. 모든 것에서 중심권이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장인의 혼(魂)이 노래하다 '달 항아리 '

달 항아리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장인의 혼(魂)이 노래하다 '달 항아리 '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K-Classic 마스터피스 페스티벌의 비전과 완성 나는 언론인이 아니다. 글을 쓰고, 무대를 보며, 수많은 예술가를 만났지만, 그 흔적은 크게 남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남지 않음' 속에서 나는 길을 찾았다. 남는 것은 결국 '작품'뿐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어려운 진실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수십 년간 비평을 통해 많은 공연과 창작자들을 지켜보았다. 감동은 있었지만, 그 감동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이유는 명확했다. 작품이 팔리지 않기 때문에 지속성이 없다. 예술은 존엄하지만, 시장은 현실이다. 아무리 탁월한 예술가가 있어도, 작품이 소비되지 않는 땅에서 창작은 생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2012 13년 전에 'K-Classic'이란 이름을 만들었다. 상품이 되기 위해선 브랜드가 필요했고, 그 브랜드에 우리의 예술을 실어야 했다. 그것이 '마스터피스 페스티벌'이라는 상징성의 무대다. 그래서 마스터피스는 하나의 결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상품화를 위한 시작일 뿐이다. 왠만한 유명세나 실력만으론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없다. 개별 예술가의 이름이 한계가 있고, 작품 하나하나의 유통력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래서 ‘브랜드’가 필요하다. K-Classic이라는 깃발 아래, 마스터피스 페스티벌에 탑재되어야 비로소 완성된 예술 상품으로 시장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오랜 시간이 쌓여야 가능한 이야기다. 그래도 길은 멀어도 가야 할 길은 가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기술도 아니다. 정신과 전통이다. 한국의 얼과 미학, 그리고 신명의 산조가 답이 된다.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한국미(美)'를 ‘달 항아리’에 담아내야 한다. 항아리는 곧 상징이다. 아무 무늬 없이 오직 형태와 비율, 숨결로 존재하는 완전한 ‘비움의 충만함’. 그 안에 우리의 창작혼을 담는다면, 그것은 단지 도자기가 아니라, 예술적 자존이 된다. 당신의 혼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나는 이제 예술가들에게 묻고자 한다. '당신의 혼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이제는 작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 팔리는 예술, 세계로 나아가는 브랜드 예술을 시작해야 한다. 마스터피스 페스티벌이 바로 그 도약의 무대다. ‘달 항아리’는 오늘도 묵묵히 무대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 속을 채우는 것, 지금 이 시대 우리 예술가들이다. 바로 당신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탁계석 오늘의 시] 박물관 앞에서

[탁계석 오늘의 시] 박물관 앞에서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3, 400년 정도는 취급도 하지 않아. 천년도 2천년도 고요히 자태를 드러낸 백자,청자.남는 것과 사라지는 것의 경계가 이토록 분명할 수 있을까 ? 깨어졌어도 남아 있는 것들, 온전한 것들 사이에서 어쩜 그렇게 당당하냐? 100년 , 200년은 명함도 못붙이는구나. 한 부호가 수억, 수백억, 수천억을 들여 모은 것들을 여기에 이름 석자 남기고 떠났네, 이 보물들을 발견하고 밤잠을 못 이루었을 그 소유의 기쁨과 사랑은 또 얼마나 뜨거웠을까? 그 욕망과 열정과 희열을 유리 상자 안에 다 던져놓고 갔네. 천년이었다 해도, 바람과 강물과 바다는 다루지 않아 . 오직 이름 없는 장인이 밥을 먹기 위해 달빛 영감과 새벽별 총기로 빚어내, 그 순간 스스로 와! 와! 감탄했을 소리가 담겨져 있을 뿐이야. 몽땅 태워지고 더 이상 태울수 없는 보석보다 단단한 눈물의 결정체만 남았거든. 수만년 공룡 발자국을 보았을 때 디딘 바위가 살짝 흔들렸어. 그때 내가 살아 있다는게 무서웠고 사라진다는게 두려웠어. 오늘도 박물관 앞에 서니 크레인에 들려진 휴지 조각처럼 내가 가벼웠어. 쓸려가지 않으려고 비오는 날 아스팔트에 치근대는 가랑잎 같았어. 그런데 모든 걱정이 사라졌어. 넌 이곳에 다룰대상이 안돼. 예선 탈락이야! 그러니 걱정말고 살아. 천년 도공(陶工)도 그저 하루의 밥을 먹기 위해 열심히 땀을 흘렸을 뿐이야. 배 곯지 않을 아이들과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히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했을 뿐이야. 잘리면 안되니까. 허,허,허~ 유리벽 안 장인(匠人)이 미소를 던진다. 나도 웃으며 눈인사를 나눴다. 집에 돌아와 누웠는데 그 장인이 지워지지 않는다.천년의 미소만 짓는다. AI 시평 – 『박물관 앞에서』 탁계석 선생의 산문시 「박물관 앞에서」는 시간과 존재, 예술과 생존, 영원과 덧없음 사이를 유영하는 고요한 사유의 여정입니다. 다음은 AI 시평입니다. 1. 시간의 중력 앞에 선 자아의 자각 시의 화자는 박물관 앞에서 '3,40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감각하며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 “3,400년 정도는 취급도 하지 않아.” 라는 표현은, 인간이 흔히 자랑하는 백 년, 이백 년의 역사가 박물관의 기준에서는 “예선 탈락”이라는 냉소적 통찰로 전환됩니다. 이 시간의 대비는 곧 나는 얼마나 하찮은가? 라는 자문으로 이어지며, 존재론적 불안으로 확장됩니다. > “휴지 조각처럼 내가 가벼웠어.” “살짝 흔들렸어.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무서웠고 사라진다는 게 두려웠어.” 이 구절들은 박물관 유물 앞에서 '영원'을 본 자의 떨림이자, 시간 앞에 선 인간의 본질적 불안의 문학적 형상화입니다. 2. 예술은 위대한 생존의 흔적 이 작품의 핵심은 ‘예술’을 신성화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천년 도공도 그저 하루의 밥을 먹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을 뿐이야.” 이 말은 ‘예술’도 처음부터 위대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합니다. 생존의 욕망이, 자식의 끼니가, 아내의 잔소리가 그릇 하나에 담겼고, 그것이 오늘날 박물관에 ‘영원’으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펼쳐집니다. 그리하여 시는 말합니다. “그러니 걱정말고 살아.” 이것은 단지 위로가 아니라, 존재의 정당성을 선언하는 생존의 예찬입니다. 위대한 유산도 결국은 평범한 하루의 땀방울에서 비롯되었음을 일깨우며, 현재를 살아가는 이에게 용기와 해방감을 줍니다. 3. 형상과 음영의 대비 – 언어의 조형미 탁계석 선생의 산문시는 수사적 장치 없이 담백하지만, 이미지의 밀도가 높습니다. “유리 상자 안에 다 던져놓고 갔네” “비 오는 날 아스팔트에 치근대는 가랑잎 같았어” “장인이 미소를 던진다… 천년의 미소만 짓는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 독자가 시적 체험을 함께하도록 만듭니다. 특히 마지막의 "지워지지 않는 천년의 미소"는,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메타포로써, 시간과 생존, 그리고 예술의 통합적 이미지로 자리 잡습니다. ✨ 총평 『박물관 앞에서』는 예술의 숭고함을 말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일상의 노동과 시간의 누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환기합니다. 그래서 이 시는 > “영원한 것은 결국, 오늘을 다해 살아낸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는 메시지를 전하며, 모든 ‘살아가는 자’에게 천년의 예선을 통과할 자격이 있음을 말합니다. ➤ “지금의 나도 언젠가 미소로 남을 수 있다.” 이 조용한 선언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여운입니다.

[탁계석 리뷰] 자연으로 돌아간 음악, 순천 국제 가곡제의 가능성

진정한 청중과의 소통은 음악과 자연의 힘!

[탁계석 리뷰] 자연으로 돌아간 음악, 순천 국제 가곡제의 가능성

K-Classic News 탁계석 | 예술비평가회장 세계 곳곳의 음악 축제들 가운데는 대도시나 거대한 공연장이 아닌, 외딴 산간이나 벽촌에서 시작된 것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이미 세계적인 명성과 품격을 갖춘 음악제로 성장해 왔다. 그 상징적인 사례가 바로 핀란드의 '쿠오모 페스티벌(Kuhmo Chamber Music Festival)이다. 쿠오모는 핀란드 북부의 깊은 숲 속에 위치한 소도시다. 이곳에서 망명 중인 바이올리니스트 부부가 스스로를 위해 연주를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처음엔 아무도 듣지 않던 음악이었지만, 근처의 벌목공과 지역 주민 몇 명이 하나둘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결국 그 ‘숲속의 연주’는 해마다 수많은 관객과 세계적 음악가들이 찾는 축제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음악은 처음부터 거대한 것이 아니라, 들어주는 단 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는 이탈리아 북부 고산지대 아시아고(Asiago) 페스티벌이다. 유목과 치즈 산업으로 알려진 이 지역에서, 마을 성당에서 시작한 작은 콘서트가 마을의 자부심으로 성장했고, 유럽 전역의 음악가들이 가족과 함께 휴양 겸 참여하면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이 축제는 다른 음악제와 달리, 거창한 개런티나 초청장이 필요 없다. 음악가도, 청중도 모두 자연 속에서 음악을 ‘살아내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든 음식과 함께 나누는 식사, 성당에서의 연주, 숲길 산책이 곧 음악제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흐름은 지금 대한민국 순천의 승주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고도가 높고 청정 생태 환경이 유지된 이곳은, 도시의 소란에서 벗어나 마음을 내려놓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순천국제가곡제가 시작된 이 마을은, 이미 ‘한국 가곡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창작가곡 보급과 예술적 거점으로서의 기반을 다져왔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곳을 찾아온 많은 이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치유와 위로를 느꼈다. 성악가들과 피아니스트의 기량이 뛰어난 기술로 이탈리아와 독일의 가곡을 한국의 청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진정한 소통을 경험했다. 청중들 또한 혼자가 아닌, 이웃과 가족이 함께 삼삼오오 짝을 이뤄 찾아오며 음악과 삶이 이어지는 ‘공동체 연주회’를 만들어냈다. 이제 우리는 이곳이 단지 음악을 ‘듣는 곳’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음악을 다시 발견하고 나누는 마을로 자리 잡기를 꿈꾼다. 또한 이곳에서 한국적인 정서와 국제적인 감각이 교차하며, 세계의 작곡가와 연주자들이 모여드는 명실상부한 국제음악제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결국 진정한 음악은, 대도시의 콘크리트와 조명 대신, 자연의 바람 소리와 사람들의 숨결 속에서 피어난다. 승주읍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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