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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iha Art Gallery] 생명 상태의 조형 언어를 표현하는 대만 조각가 <薛翔之 Eric Hsueh 셰 샹즈>

'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인간과 세계가 끊임없이 대화해 온 흔적

[Sopiha Art Gallery] 생명 상태의 조형 언어를 표현하는 대만 조각가 <薛翔之 Eric Hsueh 셰 샹즈>

K-Classic News 리뷰 한경수 | "진정한 예술은 마음과 손의 결합에서 나온다." - 콘스탄틴 브랑쿠시 (Constantin Brancusi) 세 샹즈에게 조각의 매력은 형태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손과 '시간'이 남긴 흔적에서 비롯된다. 그는 금속이라는 극도로 차갑고 단단한 재료를 좋아한다. 그러나 거의 원초적이고 직관적인 손작업 방식으로 이를 절단하고, 연마하며, 어긋나게 배치하고 다시 결합한다. 하나의 선 하나의 흔적은 반복적인 탐색과 조정 속에서 태어나며, 모든 균열과 접합은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본래 냉혹한 스테인리스 스틸은 인간의 온기와 정신성을 지닌 물질로 전환된다. 그의 작품 속에서 동물의 형상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의식을 투영한 존재이다. 그것은 야성적이면서도 절제되어 있고, 강인하면서도 부서질 듯하며, 그 엄정함은 수용에서, 적응에서, 끊임없는 변형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존재는 마치 우리 모두가 삶의 상처를 지닌 채, 자신만의 질서와 힘을 찾아가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그는 거울처럼 반사되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손으로 절단한 선들을 통해 이러한 생명 상태를 구축한다. 그것은 현실적이면서도 허구적이고, 연약하면서도 견고하다. 이로써 조각은 하나의 열린 언어가 되어, 단순히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관람자가 자신의 이야기와 감각을 투영하며 그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한다. 조각은 그에게 있어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인간과 세계가 끊임없이 대화해 온 흔적이다.

[노유경 리뷰] 공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81주년 추모 행사「Vertonte Gedichte jüdischer Dichterinnen」(유대인 여성 시인들의 시에 붙인 노래)

노래된 시, 설명된 기억

[노유경 리뷰] 공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81주년 추모 행사「Vertonte Gedichte jüdischer Dichterinnen」(유대인 여성 시인들의 시에 붙인 노래)

K-Classic News 노유경 평론가 기자 [노유경 리뷰] 공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81주년 추모 행사「Vertonte Gedichte jüdischer Dichterinnen」 (유대인 여성 시인들의 시에 붙인 노래) 장소: 독일 NRW 지역, 부르크하우스 비엘슈타인(Burghaus Bielstein) 시간: 2026년 1월 21일(19:00–20:30) 노래된 시, 설명된 기억 비엘/비엘슈타인에서 열린「유대인 여성 시인들의 시에 붙인 노래」 추모 공연 행사 개요: ‘시’가 무대가 된 추모 프로그램 2026년 1월 27일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81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에 맞춰 독일 NRW 지역 비엘/비엘슈타인(Bielstein, Wiehl)에서는 추모 행사가 기획되었고, 행사는 2026년 1월 21일(19:00–20:30) 이미 진행되었다. 공연의 제목은 「Vertonte Gedichte jüdischer Dichterinnen」 (유대인 여성 시인들의 시에 붙인 노래)이며, 작곡가·리트 작가·시인 게르노트 블루메(Gernot Blume)와 그의 아내 줄리 스펜서(Julie Spencer, 디지털 프로젝션/시각 작업)가 공동으로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공연은 부르크하우스 비엘슈타인(Burghaus Bielstein, Wiehl)에서 열렸으며, 주최는 Freundeskreis Wiehl/Jokneam e.V., 협력 기관으로는 Konrad-Adenauer-Stiftung과 Katholisches Bildungswerk Oberbergischer Kreis가 참여했다. 도시의 정적: 도착 순간부터 시작된 ‘거리 두기’ 공연에 앞서 도시에 도착했을 때, 비엘슈타인은 조용했다. 수요일 오후의 거리에는 사람의 움직임이 많지 않았고, 문을 닫은 가게도 적지 않아 커피 한 잔을 마실 곳을 찾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요는 불편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 행사가 다루려는 기억의 방식을 (과장 없이, 한 걸음 물러서서, 침착하게) 먼저 보여주는 분위기였다. 비엘의 공기 또한 얇고 서늘했으며, 바람이 거칠지는 않았지만 해가 기울 무렵 체감 온도는 빠르게 내려갔다. ‘환영’이라기보다 ‘거리 두기’에 가까운 공기 속에서, 도시는 소리로 기억을 호출하지 않았다. 대신 이미 준비된 침묵이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동선이나 큰 표식 대신, 목적지만 또렷이 남아 있었다. 건물 앞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말소리는 자연스럽게 낮아졌고, 그 변화는 누군가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공간이 요구하는 태도처럼 보였다. 공연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는 조용히 제안되고 있었다. 장소가 가진 시간: 부르크하우스 비엘슈타인(Burghaus Bielstein) 공연 장소인 부르크하우스 비엘슈타인(Burghaus Bielstein)은, ‘오늘의 프로그램’만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시간을 가진 공간이었다. 이 건물은 18세기 초, 대략 172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안내된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이 일대(오늘의 비엘슈타인)에서 훔부르크(Homburg) 측의 관료였던 산림·광산/지역 행정 책임자 크리스티안 슈미트(Christian Schmidt)가 여러 토지를 매입하고, 1720년 무렵 ‘Burghaus’를 건립한 것으로 서술된다. 그래서 그날, 관객이 이 건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단지 ‘공연장에 입장한다’는 동작이 아니었다. 오래된 벽과 구조가 품고 있는 느린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 위에 또 하나의 기억이 덧씌워질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런 장소에서 ‘홀로코스트, 전쟁, 추방, 이주’라는 주제를 다루는 시가 노래로 옮겨지는 일은, 무대를 화려하게 꾸미는 방식이 아니라—시간이 켜켜이 쌓인 건물 자체가 이미 하나의 증언이 되게 하는 방식에 가깝다. 관객은 공연장에 ‘입장’한다기보다, 오래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 앉게 된다. 이 공연의 핵심: 형식과 선택, 그리고 다수의 여성 언어 이 공연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형식’에 있었다. 게르노트 블루메(Gernot Blume)는 시를 노래하기에 앞서 설명하는 음악가다. 그는 말로 먼저 시의 배경을 제시하고, 피아노로 그 말의 여백을 만들며, 마지막에 목소리로 시를 올려놓는다. 이 순서는 우연이 아니다. 그의 피아노와 목소리는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비극을 즉각적으로 자극하는 호소 대신, 기억이 놓일 자리를 먼저 마련하는 태도에 가깝다. 그래서 관객은 ‘느끼기’ 이전에 ‘알게’ 되고, ‘알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느끼게’ 된다. 블루메는 각 곡을 연주하기 전에, 시인의 생애와 시가 쓰인 역사적 조건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이 설명은 음악을 보조하는 해설이 아니라, 이 노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히는 행위였다. 그 결과, 노래는 감정의 즉각적인 폭발이 아니라 증언의 전달로 자리 잡았다. 음악은 무언가를 대신 말하지 않았고, 말과 함께 책임을 나누어 지고 있었다. 음악적으로도 이 공연은 단일한 양식에 머물지 않았다. 일부 곡은 미리 작곡되어 암보된 형태였고, 일부는 즉흥 연주에 가까운 자유를 지녔다. 아코드 진행은 기능화성에 묶이지 않았으며, 아토날적 음향과 마이크로톤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때로는 서양 현대음악의 어법이라기보다, 가멜란이나 한국 전통 악기에서 들을 수 있는 미분음의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이 불안정하고 열려 있는 음향은, 시가 태어난 세계—안정된 조성이나 종결을 허락하지 않았던 세계—와 맞닿아 있었다. 여기에 줄리 스펜서(Julie Spencer)의 디지털 프로젝션은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뤘다. 그녀의 시각 작업은 시를 해석하지 않았으며, 이미지들은 특정 의미를 강요하지도, 감정을 지시하지도 않았다. 대신 시와 음악이 지나가는 동안, 기억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시각적 공간을 조성했다. 이 덕분에 관객은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머무를 수 있는 주체로 남을 수 있었다. 이날 무대에 호출된 이름들 역시 이 형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넬리 작스(Nelly Sachs, 1891–1970), 게르티 슈피스(Gerty Spies, 1897–1997), 로제 아우슬렌더(Rose Ausländer, 1901–1988), 힐데 도민(Hilde Domin, 1909–2006), 일제 아이힝어(Ilse Aichinger, 1921–2016), 엘제 라스커-슐러(Else Lasker-Schüler, 1869–1945), 다그마어 닉(Dagmar Nick, 1926–), 게르트루트 콜마르(Gertrud Kolmar, 1894–1943), 마샤 칼레코(Mascha Kaléko, 1907–1975), 젤마 메어바움-아이징어(Selma Meerbaum-Eisinger, 1924–1942),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이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정리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신에게 항의하는 언어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일상의 문장 속에 생존의 흔적을 기록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감정의 파동을 넘어서 사유의 문법으로 시대를 통과했다. 중요한 것은, 이 공연이 그 서로 다른 결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다듬어 관객에게 건네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각각의 언어가 지닌 온도와 리듬, 침묵의 밀도를 지우지 않은 채 그대로 병치함으로써, 우리가 익숙하게 기대하는 통합적 서사—결국에는 어떤 의미로든 정리되고 수렴되는 이야기—가 얼마나 쉽게 기억을 도식화하는지를 역으로 드러냈다. 기억이 몇몇 ‘대표 이름’으로 환원되는 순간, 추모는 이해의 과정이라기보다 기념비의 형식으로 굳어 버리기 쉽고, 그때 남는 것은 다수의 목소리가 아니라 단정된 상징들 뿐이다. 그러나 이 무대는 그 환원을 거부했으며, 홀로코스트의 경험이 단일한 사건으로 매끈하게 설명될 수 없었던 것처럼, 그 경험을 말하는 언어 또한 단일한 톤으로 묶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로 선언하기보다 ‘선택의 방식’과 ‘배치의 질서’로 조용히 증명해 보였다. 이날 불려지고 화면에 제시된 시들은 하나의 답으로 관객을 안심시키기보다, 서로 다른 결의 질문을 남긴 채 끝까지 ‘현재형의 언어’로 머물렀다. 이 시들은 위로를 제공하기보다는, 말해지는 순간마다 다시 작동하는 윤리적 긴장을 요구했다. 게르트루트 콜마르 (Gertrud Kolmar)의 「Der Misshandelte」는 감금된 방의 빛, 반복되는 감시와 폭력을 냉정하게 배열하며, 신앙의 언어조차 즉각적인 구원으로 닫히지 못하는 지점을 드러낸다. 여기서 ‘견딘다’는 태도는 고결한 미덕이 아니라, 신체와 윤리가 동시에 마모되는 조건으로 제시된다. 시는 살아남음이 언제나 손상과 함께 온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마샤 칼레코 (Mascha Kaléko)의 「Rezept」는 표면적으로는 생활의 조언처럼 보이지만, ‘짐을 꾸리고’, ‘기대를 줄이며’, ‘비밀을 지키라’는 문장이 반복될수록 한 개인이 시대의 압력 속에서 스스로를 생존 가능한 크기로 축소해야 했던 과정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이 시는 그 축소가 무엇을 지켜냈는지보다, 무엇을 잃게 했는지를 되묻는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의 「Trost」는 위로를 감정의 회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상처가 다시 깨어나는 시간, 삶의 저울이 부재한 세계를 통과한 끝에 남는 것은 ‘그저 존재함’뿐이라는 문장은 위로의 정의 자체를 전복하며, 인간이 끝내 지켜야 할 최소 단위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젤마 메어바움-아이징어(Selma Meerbaum-Eisinger)의 「Lied」에서 “받아 달라”는 요청은 기쁨의 제안이 아니라, 이미 상실을 통과한 이후의 목소리로 들린다. “비가 운다”는 진술과 함께 ‘행복의 시간은 지나갔다’는 인식이 너무도 투명하게 놓여, 짧은 언어가 오히려 긴 침묵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로제 아우슬렌더 (Rose Ausländer)의 「Wenn ich vergehe」는 내가 사라져도 태양은 타오르고 세계는 자기 법칙대로 움직인다는 냉정한 우주적 문장들을 제시한 뒤, 끝에서 “나를 위해 한 마디를 말해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 질문은 이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요청으로 되돌아온다. 노래가 끝난 뒤 남은 것은 감상이 아니라 ‘대신 말하기’의 윤리였다. 화면에 비친 얼굴들—젊은 학생처럼 보이는 초상에서 노년의 얼굴까지—이 주는 평온한 인상과 그 삶의 처절함 사이의 간극 때문에, 관객은 사진이 말하지 못하는 현실을 오히려 언어로부터 역추적하게 된다. 말은 아름다움으로 상처를 덮지 않았고, 정확함 때문에 더 아프게 남아, 읽히고 불리는 순간마다 책임을 호출했다. 이 질문들이 마지막에 더욱 선명해진 것은, 각 노래가 시작되기 직전마다 무대 위 스크린에 시인의 얼굴이 차분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화면에는 이름과 생몰 연도가 함께 나타났고, 젊은 학생의 얼굴에서부터 긴 세월을 견딘 노년의 얼굴까지, 서로 다른 시간대의 표정들이 하나씩 호출되었다. 그러나 그 얼굴들만 바라보았을 때, 그들이 통과해야 했던 삶의 궤적을 온전히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사진 속 인물들은 우아해 보이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 이미지가 품고 있는 침묵 뒤에는 사진만으로는 끝내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미지가 말해 주지 못하는 처절함, 기록으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 폭력의 시간들이 그 얼굴들 뒤에 겹겹이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언어는 침묵하지 않았다. 시는 스스로의 상처를 미화하지도, 완곡하게 감추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지나치게 정확한 언어로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다. 그 언어가 노래로 불려지는 순간마다, 그것은 감정의 고조라기보다 증언의 반복처럼 들렸고, 마치 말 한 줄 한 줄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남겼다. 이 지점에서 공연은 익숙한 추모의 습관을 멈추게 했다. 이 언어들이 오늘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이 말들이 다시는 침묵 속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다는 것 이러한 공연이 독일에서 정기적으로 열린다는 사실 역시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전쟁과 집단학살의 가해 역사를 지닌 사회에서, 이러한 추모 행사가 특정 개인이나 일회성 기획이 아니라, 시민 단체와 교육 기관, 정치교육 재단의 협력을 통해 꾸준히 기획되고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중요한 맥락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 무대가 도달한 지점은 단순한 “우리는 기억한다”라는 선언이 주는 안정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공연은 “기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태도를 분명히 취하고 있었고, 여기서 기억은 반성의 성취나 도덕적 자부심의 언어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를 요구하는 책임의 언어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날의 음악 또한 눈물을 강요하지 않았고, 관객을 대신해 감정을 소모해 주지도 않았다. 음악은 끝까지 절제된 태도를 유지한 채, 반복해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말들을, 이 시들을, 이 기억을 이제 누가 이어서 말할 것인가. 부르크하우스 비엘슈타인의 오래된 벽 안에서 던져진 이 질문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바로 그 점에서 이 무대는 단순한 추모를 넘어, 기억을 현재형으로 유지하는 드문 순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글 | 노유경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음악학 박사, 쾰른대학교 출강 해금앙상블 K-YUL 음악감독 겸 단장 ynhovon1@uni-koeln.de Instagram: @hangulmanse · @kyul_germany [Rezension |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Konzert: Gedenkveranstaltung zum 81. Jahrestag der Befreiung von Auschwitz „Vertonte Gedichte jüdischer Dichterinnen“ (Lieder auf Gedichte jüdischer Dichterinnen) Ort: NRW, Burghaus Bielstein (Wiehl/Bielstein) Zeit: 21. Januar 2026 (19:00–20:30) Vertonte Gedichte, erläuterte Erinnerung Gedenkkonzert „Vertonte Gedichte jüdischer Dichterinnen“ in Biel/Bielstein Überblick: Ein Erinnerungsprogramm, in dem „Gedichte“ zur Bühne werden Der 27. Januar 2026 markiert den 81. Jahrestag der Befreiung des Konzentrationslagers Auschwitz. Aus diesem Anlass wurde in Biel/Bielstein (Bielstein, Wiehl) in Nordrhein-Westfalen eine Gedenkveranstaltung konzipiert; das Programm fand bereits am 21. Januar 2026 (19:00–20:30) statt. Der Titel lautete „Vertonte Gedichte jüdischer Dichterinnen“. Gestaltet wurde der Abend gemeinsam von dem Komponisten, Liedschöpfer und Dichter Gernot Blume sowie seiner Ehefrau Julie Spencer, die für die digitalen Projektionen bzw. die visuelle Gestaltung verantwortlich war. Veranstaltungsort war das Burghaus Bielstein (Burgstraße 9, 51674 Wiehl). Veranstalter war der Freundeskreis Wiehl/Jokneam e.V.; als Kooperationspartner wirkten die Konrad-Adenauer-Stiftung und das Katholische Bildungswerk Oberbergischer Kreis mit. Die Stille der Stadt: Eine „Distanz“, die schon bei der Ankunft beginnt Schon bei der Ankunft vor dem Konzert wirkte Bielstein still. An einem Mittwochnachmittag war wenig Bewegung auf den Straßen; nicht wenige Geschäfte waren geschlossen, und selbst einen Ort für eine Tasse Kaffee zu finden, erwies sich als schwierig. Doch diese Ruhe war keine Unannehmlichkeit – sie schien vielmehr jene Form des Erinnerns vorwegzunehmen, die der Abend später entfalten würde: ohne Übertreibung, einen Schritt zurück, nüchtern und konzentriert. Auch die Luft in Biel war dünn und kühl; der Wind war nicht scharf, doch mit der sinkenden Sonne fiel die gefühlte Temperatur rasch. In einer Atmosphäre, die eher Distanz als Willkommen signalisierte, rief die Stadt die Erinnerung nicht mit Lärm herbei. Stattdessen wartete eine bereits vorbereitete Stille auf das Konzert. Anstelle eines glänzenden „Event“-Ablaufs oder auffälliger Markierungen blieb nur das Ziel eindeutig. Je näher man dem Gebäude kam, desto leiser wurden die Stimmen – nicht weil es jemand verlangte, sondern als wäre es eine Haltung, die der Ort selbst einforderte. Das Konzert hatte noch nicht begonnen, und doch wurde bereits still vorgeschlagen, wie man hier zu hören habe. Zeit im Raum: Burghaus Bielstein Das Burghaus Bielstein war nicht bloß ein Gefäß für das „Programm des Abends“, sondern ein Ort mit eigener Zeit. Es wird als Bau des frühen 18. Jahrhunderts beschrieben, etwa um 1720. Angaben zufolge erwarb damals Christian Schmidt, ein Beamter der Homburgischen Verwaltung (zuständig für Forst-, Bergwerks- und regionale Verwaltungsangelegenheiten), mehrere Grundstücke und ließ um 1720 das „Burghaus“ errichten. An diesem Abend bedeutete der Gang in das Gebäude daher mehr als die schlichte Bewegung „in einen Konzertsaal“. Man trat in eine langsame Zeit ein, die alte Wände und Strukturen gespeichert haben – und man setzte sich an einen Platz, an dem sich eine weitere Schicht Erinnerung ablagern würde. In einem solchen Raum Gedichte zu Themen wie Holocaust, Krieg, Vertreibung und Migration als Lieder erklingen zu lassen, heißt nicht, eine Bühne äußerlich zu schmücken; es heißt vielmehr, den Ort selbst – durch seine geschichtete Zeit – zu einem stillen Zeugnis werden zu lassen. Das Publikum „betritt“ den Saal nicht nur; es tritt in einen historischen Zeitraum ein und nimmt darin Platz. Der Kern des Abends: Form, Auswahl – und eine Pluralität weiblicher Sprachen Das Entscheidende dieses Programms lag vor allem in seiner Form. Gernot Blume ist ein Musiker, der erklärt, bevor er singt. Er stellt zunächst in Worten den Hintergrund eines Gedichts vor, schafft dann am Klavier einen Resonanzraum für diese Worte – und legt schließlich die Stimme darüber. Diese Abfolge ist nicht zufällig. Seine Klavier- und Stimmführung drängen nicht zur Emotion. Statt einer sofortigen, affektiven Anrufung des Tragischen wählt Blume eine Haltung, die zuerst einen Ort schafft, in dem Erinnerung überhaupt Platz nehmen kann. So beginnt das Publikum nicht mit „Fühlen“, sondern mit „Verstehen“ – und erst aus dem Verstehen heraus entsteht ein anderes, tieferes Fühlen. Blume erläuterte vor jedem Lied knapp die Biografie der Dichterin und die historischen Bedingungen, unter denen das Gedicht entstanden war. Diese Erläuterung war nicht bloße Begleitmoderation, sondern ein Akt des Offenlegens: Woher kommt dieses Lied – und was trägt es mit sich? Dadurch wurden die vertonten Gedichte nicht zur Bühne eines emotionalen Ausbruchs, sondern zur Übermittlung von Zeugenschaft. Die Musik sprach nicht „anstelle“ der Worte; sie trug Verantwortung mit ihnen. Auch musikalisch blieb der Abend nicht bei einem einzigen Stil. Einige Stücke waren kompositorisch ausgearbeitet und auswendig vorgetragen, andere wirkten freier, beinahe improvisatorisch. Die Harmonik blieb nicht an funktionale Progressionen gebunden; atonale Klangfelder und mikrotonale Wendungen traten selbstverständlich auf. Bisweilen erinnerte diese Klanglichkeit weniger an ein vertrautes Vokabular „westlicher Avantgarde“ als an jene Sensibilität für Mikrotöne, die man auch in Gamelan-Musiken oder in traditionellen koreanischen Instrumentalklängen wahrnehmen kann. Gerade diese instabile, offene Klangwelt berührte das, woraus die Gedichte hervorgingen: eine Welt, die keine stabile Tonika und kein beruhigendes Ende zuließ. Ein weiterer zentraler Pfeiler waren die digitalen Projektionen von Julie Spencer. Ihre visuelle Arbeit „interpretierte“ die Gedichte nicht; die Bilder setzten weder eine eindeutige Bedeutung durch noch wiesen sie dem Publikum Gefühle an. Vielmehr schufen sie, während Gedicht und Musik vergingen, einen visuellen Raum, in dem Erinnerung kurz verweilen konnte. So blieb das Publikum nicht passiver Konsument, sondern konnte als denkendes Subjekt anwesend bleiben. Die aufgerufenen Namen standen in direkter Verbindung zu dieser formalen Entscheidung: Nelly Sachs (1891–1970), Gerty Spies (1897–1997), Rose Ausländer (1901–1988), Hilde Domin (1909–2006), Ilse Aichinger (1921–2016), Else Lasker-Schüler (1869–1945), Dagmar Nick (1926–), Gertrud Kolmar (1894–1943), Mascha Kaléko (1907–1975), Selma Meerbaum-Eisinger (1924–1942), Hannah Arendt (1906–1975). Diese Stimmen lassen sich nicht zu „einer“ Stimme zusammenführen. Die eine hält die Sprache des Protestes vor Gott bis zuletzt fest; eine andere dokumentiert im Ton des Alltags die Spuren des Überlebens; wieder eine andere durchquert die Zeit mit einer Grammatik des Denkens, die über bloße Affektbewegungen hinausgeht. Entscheidend ist: Dieses Programm hat nicht versucht, diese verschiedenen Texturen zu einer großen, beruhigenden Erzählung zu glätten. Indem es vielmehr die Temperaturen der Sprache, die Rhythmen und die Dichten des Schweigens nebeneinander stehen ließ, zeigte es indirekt, wie leicht sich Erinnerung in eine vertraute, „integrierte“ Story verwandelt – in eine Erzählform, die am Ende doch wieder abrundet und abschließt. Sobald Erinnerung auf einige „repräsentative Namen“ reduziert wird, droht Gedenken zur Monumentform zu erstarren: Es bleiben dann nicht mehr viele Stimmen, sondern festgestellte Symbole. Diese Reduktion verweigerte der Abend. So wie die Erfahrung des Holocaust nie als ein einziges, glatt erklärbares Ereignis aufgehen konnte, so lässt sich auch die Sprache, die diese Erfahrung artikuliert, nicht in einen einzigen Ton binden. Das wurde hier nicht als These behauptet, sondern still durch Auswahl und Anordnung bewiesen. Gedichte als Gegenwartsform: Keine Antwort, sondern Fragen Die an diesem Abend gesungenen und auf der Leinwand eingeblendeten Gedichte beruhigten das Publikum nicht mit einer Antwort; sie hinterließen Fragen unterschiedlicher Körnung und blieben bis zuletzt eine Sprache im Präsens. Sie boten keinen Trost im Sinne einer Schließung – vielmehr verlangten sie, in dem Moment, in dem sie ausgesprochen und gesungen wurden, eine erneute ethische Spannung. Gertrud Kolmars „Der Misshandelte“ stellt das Licht eines eingeschlossenen Zimmers, die wiederkehrende Kontrolle, die Wiederholung von Gewalt in kalter Präzision nebeneinander – und zeigt einen Punkt, an dem selbst die Sprache des Glaubens nicht als sofortige Erlösung schließen kann. „Aushalten“ erscheint hier nicht als edle Tugend, sondern als Bedingung, unter der Körper und Ethik zugleich verschleißen. Das Gedicht verschweigt nicht, dass Überleben oft nur zusammen mit Beschädigung möglich ist. Mascha Kalékos „Rezept“ wirkt auf der Oberfläche wie eine Anleitung für den Alltag. Doch je öfter Sätze wie „pack die Koffer“, „erwarte nichts“, „hüte dein Geheimnis“ wiederkehren, desto deutlicher wird sichtbar, wie ein Mensch sich unter dem Druck der Zeit auf ein „überlebensfähiges Maß“ verkleinern muss – und wie sehr gerade diese Verkleinerung nach dem fragt, was dabei verloren geht. Hannah Arendts „Trost“ definiert Trost nicht als Wiederherstellung eines Gefühls. Es spricht von Zeiten, in denen alte Wunden wieder aufbrechen, von einer Welt ohne Waage des Lebens – und davon, dass am Ende dennoch „das bloße Bestehen“ bleibt. Damit verschiebt das Gedicht die Bedeutung von Trost selbst und fragt nach der kleinsten Einheit, die der Mensch unbedingt zu bewahren hat. In Selma Meerbaum-Eisingers „Lied“ klingt das „Nimm hin“ nicht als Angebot von Glück, sondern als Stimme nach dem Verlust. Mit der Feststellung, dass „der Regen weint“ und die „helle Zeit“ vorbei sei, wird die Erkenntnis der Vergänglichkeit so klar, dass die kurze Sprache ein langes Schweigen erzeugt. Und schließlich legt Rose Ausländers „Wenn ich vergehe“ nüchterne, kosmische Sätze hin: Auch wenn ich verschwinde, brennt die Sonne weiter, die Welt folgt ihren eigenen Gesetzen. Am Ende jedoch fragt das Gedicht: „Kannst du ein Wort für mich sprechen?“ – und genau dieser Satz kehrte als Frage des gesamten Abends zurück. Nach dem letzten Ton blieb nicht „Eindruck“ im Sinne einer ästhetischen Nachwirkung, sondern eine Ethik des Stellvertreter-Sprechens. Die Gesichter auf der Leinwand – von Porträts, die wie junge Schülerinnen wirken, bis zu Gesichtern eines langen, ausgehaltenen Alters – erzeugten einen ruhigen Eindruck, und gerade die Kluft zwischen dieser Ruhe und der existenziellen Härte ihrer Lebensläufe zwang das Publikum, von der Sprache her jene Realität zurückzuverfolgen, die das Foto selbst nicht aussprechen konnte. Die Worte bedeckten die Wunde nicht mit Schönheit; sie blieben – durch ihre Genauigkeit – umso schmerzhafter. In jedem Moment des Lesens und Singens riefen sie Verantwortung auf, als fiele von Zeile zu Zeile etwas wie Blut. Dass diese Fragen am Ende noch schärfer wurden, hing auch damit zusammen, dass unmittelbar vor jedem Lied auf der Bühne das Gesicht der Dichterin ruhig eingeblendet wurde: Name und Lebensdaten standen daneben; nacheinander erschienen Mienen aus unterschiedlichen Zeiten. Doch allein durch das Betrachten dieser Gesichter ließ sich die Bahn ihres Lebens kaum vollständig vorstellen. Manche Porträts wirkten elegant, in einigen Fällen sogar friedlich und glücklich – und doch lag hinter dem Schweigen des Bildes eine Realität, die das Foto nicht erreichen konnte: eine Zeit der Gewalt, die sich nicht vollständig dokumentieren lässt. Und dennoch schwiegen ihre Worte nicht. Die Gedichte verschönten die Wunde nicht und verhüllten sie nicht; sie markierten ihren Ort vielmehr mit einer Sprache, die fast zu präzise ist. In dem Moment, in dem diese Sprache gesungen wurde, klang sie weniger wie emotionale Steigerung als wie die wiederholte Form eines Zeugnisses. Genau hier unterbrach das Konzert die vertraute Routine des Gedenkens: Es stellte die Frage, warum diese Sprache bis heute überleben muss – und welche Verantwortung entsteht, damit diese Worte nicht wieder ins Schweigen gedrängt werden. Dass solche Veranstaltungen in Deutschland stattfinden Auch die Tatsache, dass ein solches Programm in Deutschland regelmäßig möglich ist, lässt sich nicht leicht übergehen. In einer Gesellschaft mit einer Geschichte von Krieg und massenhafter Gewalt ist es bedeutsam, dass Gedenkveranstaltungen nicht nur von Einzelnen oder als einmalige Projekte getragen werden, sondern durch die Zusammenarbeit von Bürgerinitiativen, Bildungseinrichtungen und politischer Bildungsarbeit kontinuierlich geplant und fortgeführt werden. Doch der Punkt, den dieser Abend erreichte, war nicht das beruhigende Gefühl einer Formel wie „Wir erinnern“. Vielmehr bezog das Programm deutlich die Haltung: Erinnerung ist nicht abgeschlossen. Erinnerung erschien hier nicht als Sprache eines gelungenen Abschlusses oder moralischer Selbstbestätigung, sondern als Verantwortungssprache, die die Gegenwart weiterhin beansprucht. Auch die Musik zwang keine Tränen und verbrauchte keine Gefühle stellvertretend für das Publikum. Sie blieb diszipliniert und stellte immer wieder dieselbe Frage: Wer wird diese Worte, diese Gedichte, diese Erinnerung von nun an weiter sprechen? In den alten Wänden des Burghauses Bielstein verschwand diese Frage nach dem Konzert nicht; gerade darin lag die seltene Qualität dieses Abends – dass er Gedenken nicht abschloss, sondern Erinnerung als Gegenwartsform offenhielt. Text |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Ph.D. Musikwissenschaft, Koreanisch, Universität zu Köln Musikalische Leitung und Ensembleleitung: Haegeum-Ensemble K-YUL ynhovon1@uni-koeln.de Instagram: @hangulmanse · @kyul_germany

[손영미 작가 ]독서와 출간의 힘, 한 권의 책이 삶을 이동시키는 방식

책은 다만,시작한 사람에게만 힘을 보여준다

[손영미 작가 ]독서와 출간의 힘, 한 권의 책이 삶을 이동시키는 방식

K-Classic News 손영미(극작가, 시인 칼럼니스트) 책을 내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출간 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 원고를 덮고 나서야 또렷해지는 공부의 방향들이다. 아래의 열 가지는 최근 필자의 시집 ‘자클린의 눈물 ‘ 책을 내면서 다시 한번 더 깨닫고 체득한 것들’이며, 동시에 누군가가 용기 내어 공부하고, 쓰고, 출간하도록 등을 미는 이유이기도 하다. 1. 책은 ‘재능’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다 책을 쓰는 사람을 보면 흔히 묻는다. “원래 글을 잘 쓰셨나요?” 그러나 책은 재능의 증명서가 아니라 시간의 누적표다. 하루 한 쪽을 쓰든, 일주일에 한 단락을 고치든 중단하지 않은 시간이 결국 원고가 된다. 재능은 방향일 뿐, 완성은 오로지 지속성의 결과다. 2. 완벽을 기다리면 영원히 출판하지 못한다 책을 내지 못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미완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출간은 완벽함을 선언하는 일이 아니다. 지금의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을 정직하게 공개하는 선택에 가깝다. 완벽을 기다리는 동안, 생각은 늙고 질문은 시효를 놓친다. 3. 출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원고를 넘기고 나면 안도감보다 먼저 드는 감정은 “이제 더 정확해져야 한다”는 책임감이다. 독자가 생기는 순간, 공부는 취미가 아니라 의무가 된다. 출간 이후의 공부는 훨씬 깊고, 훨씬 실천적이다. 4. 책 한 권이 주는 인상 메세지 나의 이력과 명함은 직함을 소개하지만 책은 사유의 밀도를 보여준다. 책 한 권은 ‘이 사람이 무엇을 오래 고민해왔는가’를 가장 명확하게 증명한다. 그래서 책을 낸 사람에게는 대화의 깊이가 달라진다. 5. 첫 책이 다음 책을 부른다 첫 책을 내기 전까지는 모든 기획이 막연하다. 그러나 한 번 구조를 끝까지 경험하면 다음 기획은 ‘가능한 일’이 된다. 출간은 재능을 증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문을 여는 행위다. 문을 열어본 사람만 다음 방을 상상할 수 있다. 6. 반복된 교정은 지식을 ‘정보’에서 ‘체득’으로 바꾼다 교정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표면적인 지식은 탈락하고 몸에 남을 문장만 살아남는다. 여러 번 고친 문장은 더 이상 남의 말이 아니라 내 사고의 근육이 된다. 7. 글을 쓰며 가장 많이 설득당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독자를 설득하려던 문장은 결국 저자를 먼저 시험한다. 논리가 허술하면 스스로 불편해지고, 감정이 가벼우면 먼저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책은 저자에게 가장 엄격한 스승이다. 8. 책은 생각을 넓히기 전에 먼저 정리하게 만든다 공부만 할 때는 생각이 흩어진다. 그러나 원고 앞에 앉는 순간 생각은 순서를 요구받는다. 책 쓰기는 사유를 확장하기 전에 사유를 구조화하는 훈련이다. 9. 책 한 권은 이후 배움의 기준점이 된다 책을 한 권 쓰고 나면 새로운 지식은 무작위로 쌓이지 않는다. 이미 만들어진 기준 위에 덧붙여진다. 그래서 출간 경험이 있는 사람의 공부는 점점 더 빠르고 깊어진다. 10. 책은 결과물이 아니라 ‘변화의 기록’이다 책의 진짜 성과는 판매량이 아니다. 쓰는 동안 바뀐 사고방식, 정제된 언어, 스스로에 대한 이해다. 그래서 책은 “이만큼 성장했다”는 과정의 증거다. 마치며… 책은 용기 없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시작한 사람에게만 힘을 보여준다. 두려워 말자. 지금의 질문으로, 지금의 언어로, 지금의 수준에서 한 권을 시작하자. 공부는 책을 낼 때 비로소 삶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강서구 낙동아트센터, 독주·실내악 중심 기획공연 이어간다

낙동아트센터 음향 특성을 확인하는 무대... 성재창 트럼펫 리사이틀

강서구 낙동아트센터, 독주·실내악 중심 기획공연 이어간다

K-Classic News 기자 | 서부산 최초의 클래식 전용홀로 문을 연 낙동아트센터가 대형 개관공연에 이어 독주와 실내악 중심의 기획공연을 본격화한다. 화려한 개관 무대가 공연장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였다면, 이후 이어지는 독주와 실내악 무대는 낙동아트센터가 지향하는 공연장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선택이다. 낙동아트센터는 흥행 규모보다 음악의 밀도를 우선 가치로 두고 개관 초기 핵심 프로그램에 독주와 실내악을 배치했다. 이를 이끄는 무대의 중심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트럼펫 연주자 성재창과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가 있다. 성재창의 트럼펫 리사이틀은 관악기 독주 무대가 드문 국내 공연 환경 속에서 트럼펫 음악의 깊이를 조명하는 자리다. 기교적 화려함보다 음색, 호흡 그리고 잔향 속에서 형성되는 음악적 밀도를 중심에 두며, 동시에 낙동아트센터의 음향적 특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대가 될 전망이다. 김다미의 바이올린 리사이틀은 대형 협연 무대와는 다른 집중도를 지향한다. 오케스트라의 외피를 벗은 독주 형식 안에서 연주자의 해석과 음악적 언어가 온전히 드러나며, 관객과의 거리감을 최소화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낙동아트센터가 지향하는 연주자 중심 무대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공연이다. 더불어 준비된 실내악 공연은 독주와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가장 섬세한 음악적 대화를 담아내는 장르다. 연주자 간의 호흡과 해석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실내악은 공연장의 음향 설계와 공간 균형을 가장 정밀하게 시험하는 형식으로 꼽힌다. 낙동아트센터는 실내악을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축적 가능한 핵심 레퍼토리로 육성할 계획이다. 낙동아트센터 송필석 관장은 “개관은 시작일 뿐, 공연장의 성격은 이후 어떤 프로그램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완성된다”며 “독주와 실내악은 공연장의 철학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르로, 크기보다 깊이를 선택하는 공연장이 되고자 한다”고 밝혔다. 대형 개관작품의 화제성을 넘어 일상적으로 클래식을 만날 수 있는 공연장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낙동아트센터의 방향성은 이번 독주와 실내악 무대를 통해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른다. 1월 22일 성재창 트럼펫 리사이틀과 1월 23일 김다미 바이올린 리사이틀 공연은 오후 7시 30분 낙동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예매는 낙동아트센터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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