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성용원 리뷰] 리뷰: 제17회 ARKO 한국창작음악제 - 국악 부분

2026년 1월 27일(화)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성용원 리뷰] 리뷰: 제17회 ARKO 한국창작음악제 - 국악 부분

K-Classic News 리뷰 성용원 | 발표 작곡가와 작품명: 강한뫼 - 파묵, 유재영 - 8개의 소품, 서민재 - 영고재, 이고운 - 대금과 관현악을 위한 '숨, 생, 시', 김지호 - 기억의 노래(재연) 이승훤 지휘 &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대금 협연: 김정승 발표된 곡과 그러지 못한 곡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고 위치가 바뀔지 누가 아는가? "여기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는 지금 이 시대에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서 직면한 질문이자 아창제가 품은 함의일 것이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서 있던 곳은 어디였나?"와 함께 "과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맞나?"라는 근원도 포함되어 있다. 무엇을 듣고 싶은지 결정하는 주체가 청중이요 대중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특히 순수예술이라는 분야에서는 고등 예술 음악으로 표상하길 원했던 이들에 의해 학계와 평단이 그걸 결정해 버렸다. 학계, 평단, 주요 기관은 음악 취향의 결정권자가 되어 자기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음악을 선별하였다. 이는 오늘의 아창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선정되지 못한 수많은, 수백 편의 작품들은 그저 수장고에 처박혀서 편견 없이 세상과 만날 날만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데 이중 오늘 발표된 곡과 그러지 못한 곡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고 위치가 바뀔지 누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청중들이 원하는 음악은 감추어진 시대 상황은 누구의 책임? 올해 국악 분야에서는 44작품이 출품되어 다섯 개를 실연으로 올렸으니 9 대 1의 경쟁률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작품들이 꼭 예술성과 작품성이 뛰어나 연주되기 위해 간택되었는가 자문하며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다. 동시대 음악이라는 폭넓은 범주에서의 포용이 아닌 현대음악(Contemporary Music)이라는 어구로 끼리끼리와 고립만 가속화 시킨 여론 형성자 또는 엘리트 학자들은 예술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음악 청중은 자신들이 속한 시대의 음악에 우선 노출되지 못하는 역사상 최초의 세대가 되고 말았고 사회가 규정한 예술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수동적인 자세만 취하게 되어 의사결정권이 상실되어버렸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고 즐길 수 없는 음악을 강요받은 청중은 본인이 영리하지 못하거나 현대음악 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해 조예가 부족하다고 자책하고 괴로워하면서 개탄한다. 이는 교회에서 시험에 들어 힘들어하는 성도에게 "넌 신앙심과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라는 야단과 주입과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좋은' 음악인지는 누가 결정하나? 거칠 것 없는 크로스오버와 완전한 자의성이 지배하는 지금, 록과 재즈뿐만이 아니라 때론 실험적인 분야에도 포스트모던이라는 치트키로 찬양받는 융합과 다원주의로 인해 “무엇이든 다 된다”라는 원칙 없는 원칙에 따라 가능한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섞고, 인용하고, 가장하고, 패러디하고, 콜라주하고 기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정작 과거의 재료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마당에 확대된 자유의 영역에서의 자의성은 깊숙이 침투해 모든 걸 집어삼키고 있다. 한국 작곡가니 국악이네 양악이네 이분법 무의미 K-Pop으로 상징되는 K-Culture로 세계를 선도하는 문화 종주국으로 대한민국이 우뚝 선 마당에 지엽적인 사고와 지역으로 국악이라는 걸 한정해서 한국적인 색채네, 우리 고유의 소리네, 민족성 따위의 케케묵은 철 지난 담론을 들먹이자는 게 아니다. 오늘 발표한 다섯 명의 작곡가들은 모두 국악기를 위해 곡을 쓰는 한국 작곡가요 그들을 가르치고 평가하고 심사한 사람들 태반이 양악을 전공하고 서양음악 아방가르드를 금과옥조로 신봉하다가 넘어오고 건너온(필자 포함) 피아노, 바이올린을 위한 곡을 쓰는 한국 작곡가니 국악이네 양악이네 구분하는 건 무의미해졌다. 서양음악의 작곡 기법을 국악기로 이식한 결과 이걸 그대로 서양 오케스트라가 연주한다고 해도 별 차이가 없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혼돈 그 자체를 유발 강한뫼의 <파묵> 마지막 코다에서의 순차적인 상향 음정에 튜티 이후 타악기의 종이 한번 울리면서 마감하는 건 전형적인 고전 양식이며, 이고운의 대금 협주곡은 현란하고 기교 과시적인 낭만 협주곡의 형태로 대금 대신 플루트가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중교배이다. 유재영과 서민재에게는 곡을 쓰기 위한 동일한 레퍼런스와 템플릿이 역력했으며 김지호의 <기억의 노래>는 음악극이나 창극의 부수음악으로 어울릴만 했다. 작곡가들이 현재 속해있는 상황과 위치, 영역과 단체에 따라 스타일이 규정되었다. 철저히 구조화된 작곡 방식으로 음의 배열, 셈여림, 음가, 음표 각각의 어택까지 통제했던 음렬주의가 존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과 같은 결과의 사운드를 발생한다는 건 비균등 리듬을 기반으로 한 혼합박자와 황종과 임종 계면조가 소리와 울림의 결과에서는 독창성과 개성보다는 유사성의 흔적이라는 의심까지 불러온다는 거와 같았다. 끊임없는 실험과 재실험은 ‘모든 것을 가지고픈’ 욕망과 성공의 의지이며 사실 예술가에는 ‘모든 것’이 별 쓸모가 없다는 진리를 발견하게끔 한다. 자기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찾은 이후의 음악은 혼동하고 싶어도 혼동할 수가 없는데 오늘의 작품들은 혼동 그 자체로 국가 기관에서 공모전으로 선발된 작품에 공정성과 작품성 논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으니 이 자체가 "미래가 기억할 오늘의 우리 음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각종 시상,위촉이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현상은 누구의 책임? 유린당한 도덕과 노골적인 거짓을 서슴지 않으면서 작품이 작가의 양심의 판 출세의 수단이 되어버리면 안 된다. 상을 받고 주요 단체의 위촉으로 탄생한 저마다 세계 초연을 무대를 거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만, 2000년대 이후 이렇게 이어온 아창제를 비롯 수많은 창작음악 발표회 이후 여전히 연주회에 올려지고 방송에서 송출되고 스트리밍 되면서 소비되고 있는 작품이 있는가? 상을 받고 보조금의 뒷배를 얻어 세상에 나온 작품들이 사라지는 현상이 오직 작곡가들의 책임인가? 자신이 속한 시대 혹은 역사적 소용돌이, 선조 등과 맺은 관계로 인해 모든 예술작품은 저마다 간단히 축약하고 간과할 수 없는 독자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생산된 시대의 일부로 치부된다. 서로 다른 음악적 전통이 만나 새로운 형태로 재해석되는 현상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음악의 본질적인 확장과 실험을 보여주며 이걸 초월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시대와 불화하는 인물들은 모방적이거나 극적인 효과를 염두에 두지 않으며 독자적인 길을 걷고 "미래가 기억할 오늘의 우리 음악"을 창작할 것이다. 2010년 아창제의 모체인 제3회 창작관현악 축제 때, 당선된 작품의 연주가 끝나고 로비에서 몇몇의 감상자들이 미국 작곡가 존 코릴리아노(John Corigliano)의 교향곡 No.1과 너무 유사하다고 수군거렸다. 심지어 개중엔 그 사람에게 수학한 제자들도 있었고 그 곡으로 논문을 작성한 사람들도 있어 의혹이 가중되어 결국 조사 결과 베낀 게 드러났다. 그리고 1년간 우여곡절을 겪고 2012년부터 ARKO한국창작음악제라는 이름의 4회로 재탄생하였다는 사실을 적시하며 평을 마친다.

[ 김다원 노트] K 예술 속 청년 음악가로 성장하기

누군가는 유학을 떠나고 돌아온 순간부터 엄청난 혼란이 인생을

[ 김다원 노트] K 예술 속 청년 음악가로 성장하기

K-Classic News 김다원 작곡가| 한국 예술 저변에 깔려있는 수많은 청년 음악가들은 무언가 모를 성공을 향해 달려간다. 아주 끈질기게. 음악가였던 청년, 음악가인 청년, 음악가를 꿈꾸는 청년. 이들 모두는 한국 음악 시장 속에서 지독한 좌절과 자기 비난에 시달린다. 유년 시절부터 예술을 전공하고자 준비한 학생일수록 평가의 잣대와 순위 매김, 명예 싸움 속에서 성장했으며, 그 성장 속에서 독인지 약인지 모를 악습과 관습을 모두 흡수하며 청년이 된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최고의 연주자'가 되기 위하여 혹독한 연습 과정을 오랜 시간 동안 거친다. 그 속에서 폭언이 있었든, 없었든지 간에 골방에 틀어박혀 연습하는 삶은 참으로 고달프다. 그들은 성장을 위해 수많은 선택과 인고의 시간을 거치며 형태가 무엇인지 알 순 없지만 아무튼 최고의 음악가가 되기 위하여 발돋움한다. 하지만 대학교를 거쳐, 혹은 더 나아가 국내 대학원을, 누군가는 유학을 떠나고 돌아온 순간부터 엄청난 혼란이 인생을 덮친다. 생각보다 연주를 못해도 돈 잘 버는 세상 관객은 '연주의 완성도'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이 모순적인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술을 단지 '즐기는 거리'로 두는 많은 수의 청중들—그 안에는 위로, 자아실현, 단순한 흥겨움, 취미 등이 있겠다- 은 특히 매체가 발달한 현시대에 엄청난 연주 실력을 가진 이른바 '대가'의 연주를 들어왔기 때문에 듣는 귀가 굉장히 높다. 하지만 전공자 혹은 매니아층이 생각하는 디테일에 대한 부분을 일반 청중들이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기획과 연출의 컨셉이 잘 잡힌 공연, 화려한 퍼포먼스나 스타덤에 오른 연주자들(대가는 이 스타덤에서 제외한다)의 공연은 청중에게 엄청난 감동을 가져다준다. 그런 공연을 보고 나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 '저런 사람도 공연을 할 수 있구나.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 둘, '성공이 도대체 뭐지, 난 도대체 무얼 위해 노력해온 걸까.' 존경할 수 없는 앞선 기성세대들, 존경할 수 없던 기성세대들을 닮아가는 나를 보며 끔찍한 기분에 시달리기도 한다. 연주를 꽤나 못해도 돈 잘 버는 한국 음악 시장. 이건 축복인가, 저주인가? 그래서 뭘 해야 돈을 벌 수 있죠? 열심히 연습하고 갈고닦은 실력을 갖고 호기롭게 졸업을 했다. 귀국 연주회, 혹은 졸업 연주회. 속된말로, 내돈내산 연주회. 갓 사회에 나온 청년 음악가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음악, 내가 추구하는 예술 미학을 돈을 버는 것과 일맥상통시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 그 결과는 텅텅 극장, 지원 사업 탈락 등으로 뼈아프게 보여지는 경우가 많다. 예술 미학을 살리며 돈을 버는 '엄청난 대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청년 음악가. 하지만 사실 연주는 제법 잘하는 비운의 음악가들. 그들은 오갈 곳이 없다. 방과후 수업, 센터 수업, 시민 문화예술 교육 등의 시간강사.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위해 내돈내산을 각오하며 다른 일을 병행하는 알바 마스터 N잡러 음악가들. 그것이 삶의 편의 지수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좋지 않다고 느끼는 건 바로 집세 보증금 대출받을 때가 아닌가 싶다. 난 분명 수많은 일을 하는데, 은행에서는 무직으로 판단하여 대출 이자를 갚을 자격에 대해 굉장히 의심받는다. 사실 내 스스로도 내가 이 돈을 지속적으로 갚을 수 있을지 의문인 상태가 가장 문제일지도! 교수직은 사람이 차고 넘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정자가 있다 없다 이야기가 나오는 와중에, 콩쿠르에서 인정받지 못한 실력 있는 음악가들, 심지어 명문대를 나오지 못한 제법 실력 있는 음악가들은 정말 설 자리가 없다. 명문대 출신의 음악가들은 명문대를 내세워 레슨을 하는 경우가 많다. 명문대 출신이 아닌 청년 음악가들 중 일부는 돈을 열심히 모아, 혹은 부유한 집의 지원으로 학원을 차린다. 그렇게 그냥저냥 살기도 하고, 때 돈을 벌며 살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을 현직 음악가로 보는 시선은 드물다는 마음 아픈 현실이 있다. 음악가 인생이 고달파 교직에 선 음악가들 또한 현직 음악가들과 구분 짓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 같다. 돈도 없고 명문대도 안 나왔는데 그냥저냥 나쁘지 않은 인정을 받아오며 자라긴 했지만 딱히 인맥도 없는, 연줄이 가난한 음악가들은 정말 기댈 곳이 없다. 나는야 다재다능한 음악가!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학창 시절까지 내 전공 하나만 잘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 없는 세상은 녹록치 않다. "돈을 드릴 테니 기가 막힌 공연 아이디어를 제출해보세요!" 기가 막힌 공연! 이게 뭐지? 라고 생각하며 처음으로 공연을 기획해본다. 우리는 모두 졸업 연주 프로그램을 직접 짜봤으니 기획자 아닌가! <음악가 아무개의 연주회> 그리고선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꾹꾹 채워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이런 기획에 돌아오는 뼈아픈 질문. "이 사업이 왜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어,,,,저는 연주를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연주자로 성장하기 위해 어쩌구 저쩌구 이런 활동 저런 활동 해서 저는 이만큼의 연주 기량이 있습니다! 제가 공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쉽게도 이번 사업엔 한정된 인원으로 인해 선정되지 못하였습니다." 지원 사업 사냥꾼들이 있다. 아니, 음악가로 살아남기 위해 지원 사업 사냥꾼이 되어가는 음악가들이 많다. "제가!(혹은 저희 팀이) 이러한 활동을 통해 1.사람들에게 이러한 긍정적인 영향을~ / 2. 한국 음악계 발전에 이러한 도움을~ / 3. 지역 발전에 이러한 도움을~…" 등등 적지 않은 음악가들은 사회의 구원자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한다. 이러한 방향성은 음악가의 시야를 넓혀주며 성장을 도모하는 것일까? 아니면, '너희가 사회에 공헌하지 않으면 알아서 살아남아라'는 메시지일까? 현실은 이러하다. 사실 음악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모든 돈 버는 행위는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유년 시절부터 '연주를 잘하는 것'에 길들여진 음악가들에게 이런 현실은 대혼란이다. 모든 공부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완벽한, 혹은 그것에 준하는 연주자가 되기 위한 방법을 탐구하고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들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이 속에서 자신을 갉아먹기도 하고, 음악을 포기하기도 하고, 자신을 포기하기도 한다. 음악은 소리 음+즐거울 락인데, 즐거운 소리를 위해 내 삶을 바치는 아이러니함을 언제쯤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청년 음악가들 중 과연 몇이나 남아 중년, 노년 음악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물며, 전공을 그만둔다 해도 각자의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공을 그만두는 것이 자신의 무능함으로 여겨지는 곳이 있다. 그러한 땅이 있다. 음악을 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 과정에서 겪는 수없는 좌절. 이 모든 것은 음악을 잘하는 내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내 삶을 온연하게 만들어가는 과정들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경수 작가 Ending Foint

[탁계석 칼럼] 예술의 선택이 왜 행복의 조건인가?

예술을 살리는 착한 가게 , 미술 대중화의 새 길로 확산되어야

[탁계석 칼럼] 예술의 선택이 왜 행복의 조건인가?

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인생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그 기준과 가치는 시대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공통된 지점이 있다. 행복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만족과 기쁨, 보람과 긍지로 구성되며, 결국 물질을 넘어 정신의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생존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어렵다. 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예술은 언제나 다른 길을 보여주어 왔다. 선택이 인간을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선택하는 존재’로 정의했다. 행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왔는가의 총합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그 선택 가운데 가장 고귀한 영역에 속한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에 시간을 쓰는가는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예술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술은 소비재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선택지다. 예술은 조건을 이기는 힘이다 역사는 예술가들이 얼마나 척박한 조건 속에서도 창조해 왔는지를 증명한다. 귀가 들리지 않으면서도 합창 교향곡을 완성한 베토벤, 시력을 잃어가며 새로운 과학의 지평을 연 퀴리 부인, 자신의 귀를 자르면서도 자화상을 그린 고호. 역경이 예술이 되는 위대함은 그 가치가 개인을 넘어 공익으로, 시대를 넘어 세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예술은 생존의 결과가 아니라, 생존을 초월하려는 인간의 의지다. 예술은 배워야 열리는 문이다 그렇하기에 예술은 쉽게 자동으로 흡수되지 않는다. 술이나 게임, 대중문화처럼 별다른 학습 없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학습제이자 경험제다. 음악회 티켓을 스스로 한번도 선택해 본 경험이 없다면 공연장은 나와는 무관한 공간이 되기 쉽고, 그림 한 점을 직접 구입해 본 적이 없다면 눈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소유'가 '안목'을 트는 지름길이란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전시장을 찾는 습관, 음악을 선택하는 경험이 어릴적 부터 경험되어야 한다.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가정문화의 문제이며, 교육이나 부모의 책임이다. 어떤이는 문화도 유전이라고 말한다. 집안의 분위기가 그대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 부모나 집안에 음악, 미술, 무용, 예술하는 경우 적어도 세 집 건너 한 사람 정도의 비율로 예술을 하는 것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예술은 삶의 깊이를 확장한다 이처럼 영향이나 경험이 없으면 예술은 나와 무관해진다. 오늘날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아무리 시(詩)가 붙어있어도 사람들의 대부분은 읽지 않는다. 한글을 몰라서가 아니라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가 본 적이 없다면, 그림은 그저 무관심하게 스치고 만다. 연장선에서 쉬운 음악만 소비하는 환경, 율동적 감각에만 집중된 케이팝 중심의 음악적 경험은 더 깊고 아름다운 미학 세계로 나아갈 사다리를 놓치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문화를 접하느냐에 따라 성향과 눈 높이가 좌우되는 것이다. '착한 예술가게'의 생활 밀착형 접근이 대중화에 한 방향이 된다 그림 한 점에 수십억, 수백억의 가치가 발생하는 이유는 단순한 희소성 때문이 아니다. 예술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미적 이익과 정신적 자산의 크기 때문이다. 때문에 예술을 선택하지 않아 삶이 편하다 생각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협소하고 다양성을 잃고, 고양된 감각과 사유의 기회를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예술의 선택은 수많은 선택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선택이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며, 예술은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깊은 통로이다. 근자에 '착한 예술가게'가 커피숍 등 생활 공간으로 파고 든다니 달라진 세태 풍경이다. 생일날 케익을 놓고 해피버스데이 노래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기에 작은 그림을 선물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 웨딩에서 부모가 그림 한 점을 선물한다면 평생 걸어 놓고 기억하지 않겠는가. 백세 시대를 향해 가는 삶과 인생 여정에 난제들이 많지만 인문학과 예술이 주는 깊은 위안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 반복되는 생활의 권태에서 벗어난 신선한 호흡이다. 특히 AI 시대를 살아가야 할 세대들을 위해 예술 동행은 필수가 아니까 한다. 그 출발은 '작은 것'으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기업 브랜드 커피숍 골리앗과 싸우는 개인 창업 커피숍의 차별성을 위하여 기업의 대형 브랜드 커피숍에 맞서야 하는 한 집 건너 생겼다 문을 닫는 개인 커피숍들이 그 경쟁력을 위해서도 차별화를 갖는 것은 윈윈의 선택이다. 작가의 그림이, 작곡가의 악보가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 어떤 형태로든 숨을 쉬고 만나 꽃처럼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권위주의 시대는 지났고, 실용화 시대가 열렸다. 자꾸보면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다보면 사랑하게 된다. 어찌 남녀간의 사랑만 그리하랴!

[ Sophia] ERDOS HAN KYUNG SU의 ** <ENDING POINT>

삶과 예술, 음악과 회화가 교차하는 순환의 미학을

[ Sophia] ERDOS HAN KYUNG SU의 ** <ENDING POINT>

K-Classic News 김은정 기자 | ERDOS HAN KYUNG SU의 ** <ENDING POINT> **는 점·선·면의 조형 언어를 통해 '끝'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그 안에 잠재된 또 다른 시작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들은 악보의 오선처럼 리듬을 형성하며, 색면과 기하학적 구조는 시각적 박자와 호흡을 만들어낸다. 이는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음악적 사고가 회화적 공간으로 전이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검은 화면 위에 배치된 강렬한 원색과 절제된 형태들은 단절과 긴장,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균형을 드러낸다. 특히 원과 직선, 반복되는 곡선의 중첩은 하나의 소리가 사라진 이후에도 진동이 공간에 남아 있는 상태를 연상시키며, '엔딩 포인트'가 곧 완결이 아니라 여운의 지점임을 암시한다. 이 작품에서 끝은 닫힌 결말이 아니라, 시간과 감각이 다시 확장되는 전환의 순간이다. ERDOS HAN KYUNG SU는 ** <ENDING POINT> **를 통해 삶과 예술, 음악과 회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지속과 순환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ENDING POINT by ERDOS HAN KYUNG SU deconstructs the notion of an "end" through the visual language of dots, lines, and planes, revealing it instead as a point of transition and renewal. Lines crossing the surface resemble musical staves, generating rhythm and tempo, while bold color fields and geometric structures create a visual sense of cadence and breath. This reflects the artist's long-standing engagement with musical thinking translated into pictorial space. Against a dark ground, intense primary colors and restrained forms evoke tension and balance. The overlapping of circles, straight lines, and recurring curves suggests lingering vibrations-like a sound that continues to resonate after the music has stopped-implying that the ending point is not closure, but a momer erberation.

Opus

더보기

Opinion

더보기

Hot Issue

더보기

반려 Friends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