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오형석 기자 |
여러분은 살면서 길고 불편한 음악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떤 교향곡은 음악사 속에 작품으로 남고, 어떤 교향곡은 인간의 기억 속에 사건으로 남는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는 분명 후자에 속한다. 이 작품은 한 작곡가의 예술적 성취를 넘어, 극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음악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드문 사례다. 오늘날 이 교향곡을 다시 마주하는 일은 단순한 작품 분석을 넘어, 음악이 인간의 생존과 어떤 방식으로 맞닿아 있는지를 성찰하는 작업이 된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은 흔히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범주로 설명되기 어렵다. 이 작품은 미학적 쾌를 제공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쓰인 음악이다. 이 교향곡을 듣는 경험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존엄을 동시에 직면하는 시간에 가깝다.

연주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레닌그라드'는 결코 친절한 작품이 아니다. 긴 연주 시간, 반복적으로 누적되는 구조, 극단적인 다이내믹 대비는 연주자에게 지속적인 체력과 고도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난이도는 음표나 기교에 있지 않다. 이 교향곡은 연주자의 심리적 태도와 해석의 윤리를 시험하는 작품이다. 지휘자와 연주자는 이 음악 앞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들리게 할 것인가”보다 먼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해석이 과도해지면 음악은 선동적으로 변하고, 지나친 절제는 오히려 무기력한 인상을 남긴다. 이 작품은 해석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즉각적으로 진실성을 잃는다.
1941년,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봉쇄했다. 약 900일에 걸친 고립 속에서 도시는 굶주림과 추위, 끊임없는 폭격에 노출되었고, 하루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바로 이 시기에 교향곡 제7번의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훗날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기록했다." 이 말은 이 교향곡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열쇠다.

■지휘자의 역할 ― 통제보다 '버팀'의 미학
이 교향곡에서 지휘자는 결코 영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과장된 제스처나 극적인 템포 조절, 과도한 감정의 개입은 오히려 음악의 본질을 훼손한다. '레닌그라드'가 요구하는 지휘자의 핵심 덕목은 통제력이 아니라 인내력이다.
특히 1악장의 이른바 '침공 주제'는 지휘자의 윤리적 판단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 반복적 주제는 쉽게 과장될 위험을 안고 있다. 템포를 밀어붙이거나 클라이맥스를 과도하게 부풀리면, 이 음악은 군사적 행진곡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가 그린 것은 군대가 아니라 '침식'이다. 공포는 돌연히 들이닥치지 않는다. 그것은 서서히, 그러나 되돌릴 수 없게 인간의 내면에 스며든다. 지휘자는 이 반복을 견뎌야 한다. 참아야 하고, 기다려야 하며, 음악이 스스로 불안을 축적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훌륭한 지휘일수록 청중은 "지휘가 뛰어났다"는 인상보다 "음악이 나를 압도했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
■템포와 시간 감각 ― 이 작품은 ‘흐르지 않는다’
'레닌그라드'에서 시간은 전통적 교향곡처럼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는다. 특히 1악장은 진행된다기보다 누적된다. 이 특성을 인식하지 못한 템포 운용은 구조 자체를 무너뜨린다. 느린 악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감정에 기대어 템포를 늘이거나 루바토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음악은 애도가 아니라 감상으로 변질된다. 쇼스타코비치의 느림은 서정이 아니라 정지에 가까운 ‘버팀’이다. 지휘자는 시간을 늘이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붙잡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케스트라 연주자의 경험 ― 소리 이전의 체력과 정신
연주자에게 이 교향곡은 물리적으로도 혹독하다. 현악기는 긴 지속음과 반복 패턴 속에서 근육을 소모하고, 관악기는 극단적인 음량 대비 속에서도 음정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금관과 타악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요구받지만, 그 폭발은 결코 감정의 분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작품에서 감정은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연주자의 역할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지 않다. 구조를 무너지지 않게 끝까지 유지하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연주자는 자신의 자아를 끊임없이 지워야 한다. 개인적 표현 욕구를 억제하고, 전체 구조 안에 자신을 봉인하는 일—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의 진실성이 발생한다.
■현악 ― 말하지 않는 증언자
현악 파트는 이 교향곡에서 노래하는 주체라기보다 증언자의 위치에 가깝다. 선율은 많지만,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말해지지 못한 감정, 삼켜진 울음에 가깝다. 비브라토의 사용 역시 극도로 절제되어야 한다. 과도한 비브라토는 감정의 과잉을 낳고, 이는 이 음악의 윤리를 훼손한다. 이 작품에서 좋은 연주는 감정이 느껴지되, 감정이 노출되지 않는다. 현악 연주자는 표현을 줄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게 된다.
■금관과 타악 ― 힘이 아니라 무게
금관과 타악은 종종 이 교향곡의 ‘전쟁성’을 담당하는 파트로 오해된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공격이 아니라 압박이다. 소리는 강하지만, 그 강함은 폭력이라기보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가깝다. 특히 타악기의 반복 리듬은 리듬적 정확성 이상으로 정신적 안정성을 요구한다. 단 한 번의 흔들림이 전체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리듬은 주목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포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다.

■리허설의 윤리 ― ‘잘 연주’보다 ‘올바른 접근’
이 작품의 리허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적 완성도가 아니다. 물론 정확성은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주자 전체가 이 음악이 요구하는 태도를 공유하는 것이다. 지휘자는 리허설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소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여기서 감정은 더해져야 하는가, 혹은 덜어내야 하는가.
이 지점은 진짜 클라이맥스인가, 아니면 착각인가.
이 질문들이 공유될 때,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연주 집단을 넘어 하나의 ‘증언 공동체’가 된다.
■연주한다는 것의 의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7번을 연주한다는 것은, 단지 어려운 작품을 완주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존엄을 지켜왔는지를 몸으로 통과하는 경험이다. 이 교향곡은 연주자를 빛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주자를 비운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질문을 남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에도, 이 소리를 끝까지 붙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는 순간, 연주자는 비로소 이 음악의 일부가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각자의 봉쇄를 경험한다. 상실과 질병, 관계의 붕괴, 고립과 불안. 우리는 각자 나름의 레닌그라드에 갇혀 살아간다. 이때 이 음악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한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승리라고.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고, 그 의미로 자신을 지켜낸다고. 필자의 지인도 이야기를 했다. 본인 스스로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나에게 마치 그 말이 절망이라는 900일 봉쇄같이 들렸다. 아직도 터널속에 갇힌 것 같다고...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그에게 실제 레닌그라드 음악이 내면을 통과하는 음악으로 존재적 회복을 돕는 사례를 보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겠지만 존재적 회복을 돕는, 무너지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린 명곡아닌가.
그래서 '레닌그라드'는 전쟁의 음악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 내면치유의 음악이다. 무너지는 세계 한가운데서도 인간은 서로를 향해 귀를 기울였고, 그 순간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남았다.
모든 말이 무너질 때, 음악은 마지막까지 남아 인간에게 말한다.
"너는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러나 일부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누구나에게 같은 효과가 있다고 검증되지 않았다. 필자에게 레닌그라드 음악이 불편했던 이유는 아마 인간의 현실이 불편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 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내는 인간의 시간을 그대로 닮은 교향곡이기에 인간의 절망속에서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내면 치유의 음악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