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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학의 문화노트] 명품 브랜드에서 느껴지는 서양 예술사 ‘중세 편’

“르네상스 이전 중세의 신성함을 브랜드로 승화한 지방시(Givenchy)”

K-Classic News  황순학 교수  | 

 

“블랙은 신성함의 최종병기다!”

 

클래식이 갖는 의미를 쉽게 설명할 수 있고,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유럽의 명품 산업이다. 우리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명품 제품이 가지는 기술적 우수성과 심미적 아름다움은 어떤 점에서 서로 닮아있기 때문이다.

 

명품은 단순히 제품을 넘어 한 국가를 대표하는 문화적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유럽이 우리보다 딱 반만 일하고 우리보다 소득이 높은 이유는 그들이 만들어 내는 제품에는 그들의 역사 즉 예술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시간에는 명품 브랜드 지방시(Givenchy)가 들려주는 중세 예술에 관한 이야기이다.중세 시대를 한 문장으로 설명할 때 우리가 자주 접하는 단어는 ‘암흑기’이다. 즉 중세 시대를 서양 역사에서의 ‘암흑기’라 흔히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세 시대를 ‘암흑기’라 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성이 배제된 신 중심의 사회였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측면이 있고, 다른 측면 하나는 중세 말의 시작된 고딕 예술의 특징 중 하나인 신비주의적 어두움에서 비롯된다. 신비주의적 어두움이라 할 수 있는 고딕 예술의 시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이 200년 이상 계속되면서 이점에 싫증을 느끼거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게 되면서 12세기경에 들어서 중세 스콜라 철학과 자연신학 등의 영향 아래에서 '빛'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고, 이는 새로운 성당 건축양식인 고딕 양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전 로마네스크 양식보다 높아진 벽 부분을 장식할 필요성이 대두 되면서 화려하고 밝은 색조에 여러 가지 색을 입힌 외부로부터의 빛을 투과해 성당 내부에 신비로운 색감을 제공하는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대유행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처럼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한 색조를 자랑한 고딕 성당들의 시대를 ‘암흑기’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점을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고딕이란 말은 원래 ‘고트족의 예술’이란 말에서 비롯되었지만, 고트족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이 중세 이후 찾아온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이 이전 중세 양식을 대하면서 비판적 측면으로 야만적이고 폭력의 대명사였던 고트족의 이름을 빌려 헐뜯으려는 의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데서 그 기원을 갖는다. 

 

특히 부축벽을 통해 하늘 끝까지 솟아 신과 조우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느껴지는 고딕 양식의 겉모습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교해 볼 때, 고딕 양식은 높아진 첨탑으로 인해 수직선이 매우 강조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 점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요즘으로 치면 벼락부자 콘셉트로 비추어진 것이다. 지금도 신흥 국가들이 높은 고층빌딩을 통해 자국의 위상을 선전하는 것과 무척 닮아있다. 뉴욕의 맨해튼,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런 점에서 고딕이란 단어가 1530년대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할 때는 이런 벼락부자 콘셉트를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문화를 묘사하기 위한 경멸적인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된다. 즉 어디까지나 서양 문화의 원조를 자처한 르네상스 시대 당시 이탈리아반도 내의 도시 국가들의 문화적 자부심과 자존심이 작용한 결과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고딕 양식의 실내 분위기이다. 실내는 이전 로마네스크 양식의 육중한 벽과 기둥이 뿜어내는 장중함보다는 가냘픈 기둥과 넓은 창을 통해 투과되는 색조 가득한 빛으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장미창을 투과한 빛이 성당 내부에 오롯이 그 빛을 드리우기 위해선 상대적으로 어둠이란 요소가 필요하다. 즉 로마네스크 양식의 단순한 구조보다는 고딕 양식은 여러 개의 가냘픈 기둥들과 기둥 사이를 이어주는 사방형 아치들이 천장 곳곳을 독립적 구조로 떠받치고 있어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시간대에 성당을 방문하면 음산한 느낌의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이처럼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에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장미창을 투과한 빛은 더욱 신비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해 질 녘 석양이 뜨거운 대낮의 중천에 떠 있는 태양보다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중세 교회는 이처럼 빛을 어떻게 연출해야 신비롭고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는지 고딕 양식을 통해 구현한 것이다. 

 

 

 

그리고 높은 첨탑으로 인해 수직적 높이만이 느껴지는 성당의 외부 모습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라인강 북쪽의 바이에른 숲속의 거대한 참나무숲을 형상화한 느낌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거짓말을 살짝 보태 각각의 나무들이 100m에 가까울 정도로 높게 솟은 침엽수림인 바이에른 숲속에서는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음산한 기운 그리고 높은 첨탑을 지탱하고 있는 부축벽은 나무의 가지와 줄기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건축물 외형을 장식한 각종 문양과 기괴한 석상들은 나무의 잎처럼 거대한 나무를 둘러싸며, 화려하고 풍요로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는 느낌을 알아챌 수 있다.

 

[바이에른 숲속 정경을 형상화한 중세 고딕 양식 건축]

 

이처럼 12세기에 프랑스 북부와 라인강 지역에서 살았던 고트족에게는 거대한 높이를 자랑하는 고딕 성당들의 자태가 자신의 터전인 숲과 자연스럽게 맞물려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 신성한 분위기이었다면, 반면에 수 세기 동안 울창한 숲보다는 구릉과 농지에서 살아온 라인강 남쪽의 사람들에겐 고딕 성당의 모습은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이국적 풍광 중 하나였다. 

 

 

[주로 구릉으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정경을 대변하는 토스카나의 풍경]

 

이처럼 서유럽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런 이질적이고 바이에른 숲속 같은 음산한 분위기를 고딕이라 정의했고, 이러한 어둠을 상징하는 검은색의 가죽 잠바, 가죽 바지 그리고 고딕 성당의 외벽을 장식했을 법한 기괴한 문양의 금속 장식을 선호하는 고딕 스타일의 대중 음악가들과 그들의 음악인 록 음악 문화를 떠올려 보면, 너무 신비롭다 못해 공포와 무서운 느낌을 자아내는 록 음악의 배경도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이처럼 중세 후기 이질적 요소인 어둠을 상징하는 블랙을 패션으로 승화한 브랜드가 바로 지방시이다. 

 

 지방시의 검은색 드레스 성공 이전까지만 해도 검은색 드레스는 서유럽 역사에서 수 세기 동안 장례식용 상복이란 이미지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이 1954년, 지방시의 드레스를 입고 주연한 영화 《사브리나(Sabrina)》가 오스카 최고의 의상상을 수상 이후 헵번은 지방시와 손을 잡고 당대의 패션 흐름을 주도해 나간다. 이후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마다 지방시의 옷을 입었으며 지방시와 헵번은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조합이라 지금도 회자 된다. 영화에서 햅번은 때로는 사랑스러운 말괄량이로 때로는 세련된 도시 여인으로 변신하였고 지방시 특유의 간결한 룩은 그녀의 가냘프고 곧은 몸매와 잘 어울렸다. 특히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프닝 장면에서 리틀 블랙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은 패션 사에서 길이길이 회자 되며 유명해진다. 

 

 

리틀 블랙 드레스는 사실은 1926년 샤넬(Chanel)의 심플하고 짧은 블랙 이브닝 드레스가 최초이다. 하지만 리틀 블랙 드레스의 상징적 이미지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고 출연한 이후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의 것이 된다. 당시 영화 촬영을 위해 지방시를 방문한 헵번은 지방시의 컬렉션 중, 등이 깊게 파인 블랙 시스 드레스(체형에 꼭 맞는 드레스, sheath dress)를 선택했고 이 유명한 블랙 드레스와 진주 다이아몬드 목걸이, 업 스타일 헤어, 버그 아이(bug eye) 선글라스는 오드리 헵번을 불멸의 영화배우이자 패션 아이콘으로 군림하게 만든다. 

 

영화를 통해 시장에서 거둬들인 리틀 블랙 드레스의 성공 이후 우리는 이제 자연스럽게 검은색을 즐겨 입고 있다. 리틀 블랙 드레스는 태어난 지 곧 9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성 패션 시장에서 여전히 매력적 아이템이다. 어떻게 보면 모던과 우아함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클래식컬한 아이템이며, 여전히 신인 디자이너부터 기성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리틀 블랙 드레스는 여전히 패션계에서 영감의 원천이자 클래식의 대명사로 사랑받고 있다. 

 

이처럼 이전까지 공포가 느껴지는 음산함의 상징색이었던 블랙의 이질적 요소를 잘 활용해 중세 문화의 의미가 결코 암흑이 아닌 긍정적 요소인 신비로움과 신성함으로 그 의미를 모던함(신비로움)과 우아함(신성함)으로 재해석한 지방시의 감각이 돋보이는 모습이다. 빛의 화려함은 상대 급부인 블랙이 있어야만 빛을 마음껏 발휘하고, 그 빛은 신성함을 대변한다는  과거 중세의 전통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결과이다.

 

즉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는 헵번을 빛으로 생각했고, 헵번의 아름다운 자태가 더욱 신비롭게 발휘될 수 있는 바탕색으로 블랙을 선택한 것이다. 중세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은 이처럼 빛과 어둠을 이용한 신비와 신성함이다. 이런 신비로움과 신성함은 지방시 브랜드가 갖는 힘으로 여전히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지방시는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대표하는 헵번을 신성한 존재로 형상화하며, 1975년 향수 '렝테르디(L’interdit)'를 만들어 그녀에게 선물한다. 프랑스어로 '금지'라는 뜻의 이 향수는 오드리 헵번 외에는 그 누구도 쓸 수 없다는 의미를 지녔다. 지방시가 중세의 시대정신을 잘 파악했으며, 적용했다는 방증이다. 

 

4세기 이후 라인강을 남하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만들어 낸 유럽 문화를 접하게 된 당시 고트족 등의 게르만 계열의 족속들이 유럽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위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의 고딕 예술을 이룩한 점, 그리고 이질적 요소라 치부되었던 고딕을 멋지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지방시의 감각적 재해석은 그들의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예술사를 언제나 새로운 것 인양, 포장해 꺼낼 보일 수 있는 예술적 감각이 우리보다는 다소 풍부하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점이 유럽 사회가 우리보다 딱 반만 일하고 소득은 높은 이유 중 하나이다. 클래식은 이런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 준다.  유럽의 명품 산업은 이처럼 클래식 속 인간 본능의 요소를 잘 찾아내 우리를 오늘도 유혹하며 우리는 속절없이 그 유혹에 못 이겨 통 크게 지갑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