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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학의 문화노트] 상업적 시각으로 다시 바라본 서양 예술사.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2. “프랑스 혁명 시대 예술가들과 예술!”

K-Classic News  황순학 교수 |

 

“예술, 나폴레옹의 선전도구로 전락한다!” 

 

현대의 프로파간다(선동:Propaganda)는 프랑스 혁명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당시 프랑스 국민은 언론과 다양한 집단에 의해 체계적인 선전에 새로운 충성심과 국가적 정체성이 강요된다. 여기에는 대중에게 어필하고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형태가 포함되었는데 신문, 팜플렛, 대량 배포용 판화, 만화와 캐리커처,연극, 노래, 공공 기념물 등이 있었다. 대중을 새로운 애국심으로 통합해야 했던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은 모든 형태의 예술이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자유와 평등과 같은 공화국의 원칙 등을 알리기 위해 당시 대부분 문맹인 대중에게 새로운 예술적 이미지가 필요해진다. 

 

이런 이미지는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동전, 편지지, 다양한 출판물 및 인쇄물에 적용했다. 심지어 카드 놀이 이미지 조차도 기존의 귀족적 이미지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디자인되었다. 혁명의 이상을 홍보하는 이미지에는 테니스 코트의 맹세와 같은 혁명의 주요 사건을 묘사한 이미지 외에도 시민적 미덕과 조국에 대한 이타적인 헌신을 강조한 이미지가 요구되었다. 이는 종종 동시대 주제를 묘사하기보다는 다음의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처럼 고대 로마의 역사나 신화가 주제가 된다.

 


그림의 주제는 브루투스 아들의 운명을 그린 모습이다. 브루투스의 아들은 공화정을 전복하고 군주제를 복위하려고 음모를 꾸몄고, 공화주의자인 브루투스 자신은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브루투스는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고 공화정의 영웅적인 수호자가 되었다. 이 그림은 공화주의가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대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대담한 시민적 미덕의 이야기였다. 미덕, 희생, 국가에 대한 헌신이라는 그림의 주제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 격변기에 공개되며 많은 반향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림에서 다비드가 묘사한 고대 로마의 요소들은 모두 당시 프랑스에서 대유행한 나머지 고대 로마 여인들이 착용한 고대 로마 복장과 관련된 스타일이 여성용 패션으로 인기를 얻었다. 

 

 

남성 머리 스타일 역시 그림에서 묘사하고 있는 브루투스의 짧은 머리 스타일이 대유행한다.

 

 

그리고 그림에 묘사된 고대 로마 시대 가구들 역시 대유행하는데, 이 유행은 나중에 디렉투아 (Directoire) 양식으로 발전한다. 디렉투아(Directoire) 양식은 총재정부(總裁政府, Directory)에 의해 통치되던 1795~1799년 기간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스타일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루이 XVI 스타일에서 임페리얼 스타일로 이어지는 사이의 과도기적 스타일이었다. 이 기간의 많은 디자인 사례는 고전주의를 이어받았지만, 더 큰 절제와 혁명과 관련된 평등, 우애, 자유의 상징이 많이 담아졌다.

 

디렉투아(Directoire) 양식의 가구와 물건은 당시 폼페이에서 발굴된 것과 정확히 같거나 골동품 꽃병과 부조에 묘사된 것을 재현해 만들었다. 곡선형 등받이와 바깥쪽으로 벌어진 구부러진 다리가 있는 다음의 고대 그리스의 의자 스타일인 클리스모스(Klismos)는 유럽 의자 디자인 사례에서 널리 모방 된다.

 

 

또한 나폴레옹 군대가 원정을 떠난 이국적인 장소의 장면을 보여주는 이미지나 동시대 사건을 나타내는 이미지가 선전도구로 그려진다. 영리한 전략가이자 정치인인 나폴레옹은 여론을 조종하기 위해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위대한 예술 작품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변화해야 할 타당성, 그리고 자신의 지도력을 대중들의 마음에 심어줄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폴레옹은 원래 금욕주의, 시민권, 자기 희생, 의무라는 공화주의적 가치를 홍보하는 데 사용되었던 1790년대의 고전주의 양식을 가져와 황제로서의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는 데 사용한다. 

 

특히 자크 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위해 노골적으로 선전적인 작품 의뢰를 맡았다.1801년에 제작한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이란 작품에서 그는 작품의 왼쪽 제일 아래 바위에 과거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향한 한니발과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을 새기며 나폴레옹을 과거 영웅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1808년에는 그의 서재에서 나폴레옹이란 작품에서는 프랑스 국민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시계는 이른 아침인 4시 13분을 가리키고 있다. 촛불은 거의 꺼져 있다.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고, 양말은 구겨져 있다. 그림은 프랑스 최초의 민법전인 나폴레옹 법전을 초안하는 데 밤을 보냈음을 묘사하고 있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는 지도자에 대한 강력한 신화를 만들어내며 탁월한 선전 효과를 거둔다.

 

 

다비드는 또한 1804년 나폴레옹 대관식 작품을 통해 나폴레옹과 그의 궁정의 물리적 화려함, 의식의 풍부함, 과거의 위대한 인물과 전통에 대한 암시를 강조하며 나폴레옹의 위용을 선전하고 있다.

 

 

다비드의 제자 앙투안 장 그로(Antoine-Jean Gros) 역시 나폴레옹의 원정에 동행하여 그의 나폴레옹을 초인에 가깝게 묘사한다. 1796년 11월 17일 아르콜 다리에 선 보나파르트 장군은 이탈리아 원정에서 손쉽게 거둔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

 

 

1804년 야파에서 전염병 환자를 방문한 나폴레옹이란 작품 역시 병자를 돕는 나폴레옹을 그리스도와 비교하고 있다. 그림에서 나폴레옹 뒤에 있는 장교는 그가 흑사병 환자를 만지는 것을 막고 있지만 나폴레옹은 대담하게 흑사병 환자의 몸을 쓰다듬는 모습으로 신격화하고 있다.

 

 

이 그림은 프랑스군이 야파를 점령하는 동안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보고에 맞서 선전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804년 9월 18일,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5월 18일에 황제로 선포되고 12월 2일에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사이에 살롱 드 파리에 전시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 죽어가는 사람을 위로하는 자비로운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와 그의 제자 앙투안 장 그로(Antoine-Jean Gros)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빙켈만이 주창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란 신고전주의의 이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 이후에도 역사적으로 독재자들에게 도용된다. 이처럼 예술이 정치를 만나면, 순수함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프랑스 혁명 시대와 이후 제정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와 앙투안 장 그로의 작품들이 이를 잘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