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황순학의 문화노트] 상업적 시각으로 다시 바라본 서양 예술사. 바로크(Baroque) 3.

“이탈리아 지폐에서 느껴지는 바로크 예술의 위상!”

K-Classic News 황순학교수 | 

 

우리나라 지폐 주인공들이 대부분 왕이나 지금의 행정고시인 과거 시험 합격자들인 것과는 다르게,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과거 이탈리아 지폐의 주인공으로는 보티첼리, 다 빈치,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카라바조, 베르니니, 벨리니, 베르디 등 지폐나 동전의 주인공 대부분이 예술가라는 사실이 색다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이탈리아 지폐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지폐에서 종종 발견되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로써 유럽 사회에서 예술에 관한 관심과 그 중요도가 우리와는 사뭇 다르게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 을 알 수 있다.

 

다음 이미지는 2002년 1월 1일 유럽이 유로화로 단일화되기 전의 이탈리아 지폐 리라(Lira, Lire) 를 장식했던 인물들이다. 먼저, 1,000리라의 주인공은 우리에게 몬테소리(Maria Montessori)로 잘 알려진 마리아 테클라 아 르테미시아 몬테소리(Maria Tecla Artemisia Montessori)이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교육자 겸 아 동 신경정신과 의사이자 과학자였으며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은 아이의 잠재력을 키워주고 발전시키기보다는, 아이의 잠재력을 실질적으로 억압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이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교육 방법을 발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여성인 몬테소리가 이탈리아 지폐에 등재된 것은 이탈리아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이자 혁명적이 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0리라의 주인공은 굴리엘모 조반니 마리아 마르코니(Guglielmo Giovanni Maria Marconi)로 이탈리아의 과학자다. 그는 전파를 통한 효과적인 원격 통신 시스템, 즉 무선 전신을 개발한 과학자 이다. 결국 그의 업적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개발로 이어졌고 모든 현대 무선 통신의 선구자로 인정 받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5,000리라의 주인공은 빈첸초 벨리니(Vincenzo Salvatore Carmelo Francesco Bellini)로 이탈리 아 낭만주의 시대 오페라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들은 특히 선율적 측면에서 유려한 선율로 유명하며, 가에타노 도니체티(G. Donizetti), 조아키노 로시니(G. Rossini)와 함께 이탈리안 벨칸토 오페라 (Bel Canto Opera)의 중심적인 작곡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0,000리라의 주인공은 알레산드로 볼타(Alessandro Giuseppe Antonio Anastasio Volta)로 이 탈리아의 화학자, 물리학자다. 무엇보다도 인류 최초의 발전기인 배터리를 발명하고 메탄가스 발견자 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지폐 앞면에는 알레산드로 볼타의 초상화가 있고, 뒷면에는 볼타 서거 100주 년을 기념하여 1927년에 건립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인 코모의 템피오 볼티아노(Tempio di Voltiano, Como)가 있으며, 여기에는 그의 연구 유물과 증언이 보관되어 있다.

 

50,000리라 주인공은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이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조각가, 도시 계획가, 건축가, 화가, 세트 디자이너 겸 극작가였다. 그는 교황 우르비노 8세는 베르니니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베르니니를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희귀한 사람, 숭고한 독창성, 신성한 성품으로 태어났으며, 로마의 영광을 위해 세기의 빛을 가져왔다.”

 

100,000리라 주인공은 우리에게 카라바조(Caravaggio)로 널리 알려진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 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이다. 그의 영향력은 카라바조주의(caravagisme)의 등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카라바조는 수많은 위대한 화가에게 영향을 끼친 명암대비법, 일명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완성한 인물이다. 그의 강력한 명암대비법은 지금의 사진술이나 영화 제작에서 인상적인 장면 연출에 있어 자주 사용 되는 매우 중요하고 유용한 기법이다.

 

최고액인 500,000리라 주인공은 역시 예술가로 우리가 잘 아는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da Urbino)로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이다. 이처럼 총 7가지 지폐의 주인공 중 한 명이 교육자, 두 명이 과학자,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이 예술가 이다. 특히 예술가 중 베르니니와 카라바조는 바로크 시대를 열었던 예술가이며, 라파엘로는 후기 르 네상스 시대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바로크 전신인 마니에리스모 예술의 태동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기도 하다.

 

리라 중 가장 고가의 지폐들을 라파엘로, 베르니니, 카라바조가 주인공임을 생각해 볼 때, 이탈리아 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가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세 명의 예술가들이 공통으로 활동한 공간이 바로 로마이고, 로마에서 바로크 예술은 시작 된다. 특히 바로크 예술의 출현을 예견한 건축물이 바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500,000리라의 주인공 라파엘로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로 기억되며, 전임자 브라만테의 원래 프로젝트 계획인 동방 정교의 정 십자가 스타일을 대폭 수정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 형태를 지 금의 라틴십자가 스타일로 새롭게 디자인한다. 이 아이디어는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거리감을 주는 효과를 만들어내며 훌륭한 공간감을 창출했다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성당 건축은 라파엘로 안을 다 시 수정한 미켈란젤로 안으로 최종적으로 건축된다.

 

[브라만테의 정 십자가 스타일(좌)과 라파엘로의 라틴 십자가 스타일(우)]

 

이 성당의 이름이 성 베드로 대성당인 이유는 중앙 돔 큐폴라 아래는 역사적으로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자리이자 무덤이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기 326년에서 333년 사이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시로 건설된 세워진 콘스탄 티누스 대성당이 그 기원이며, 1506년 4월 18일에 콘스탄티누스 성당을 헐고 재건축에 들어가 1626년까지 지어진 관계로 이 성당은 르네상스 예술과 바로크 예술을 아우르는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이 성당 건축으로 인해 기독교 세계를 둘로 나누는 결과를 낳는다.

 

성당의 자재나 벽체를 장식하고 있는 재료들은 모두 천연 재료이며, 역대 교황들은 화려한 색감의 모 자이크 장식을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북유럽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멀리 동방에까지 사람을 시켜 천 연 색감의 돌들을 찾아오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1626년 개장 이후 이 세상 건축물 중 유일하게 색 감이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지닌 보석 같은 건축물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의 어느 나라도 이 성당을 지을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 한다. 이처럼 엄청난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해 교황청은 면죄부를 판매하고 이것은 종교개혁을 촉발한다.

 

“화려함과 웅장함의 장식예술 바로크의 시작, 성 베드로 대성당과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로마 가톨릭 세력은 더는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경쟁하지 않고 상대인 칼 뱅파와 루터파를 인정하며 세상이 이제 구교와 신교로 나뉘었음을 자각하고 자신들이 확보한 가톨릭 세력권인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에서 종교적 정치적 안정을 꿈꾼다. 이런 로마 가톨릭의 염원은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속에서 피어난 나머지, 다소 불안정한 느낌의 마니 에리스모 (Manierismo) 예술에서 탈피해, 극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머지 인간의 영혼 즉 가톨릭 신자들의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아 그들의 영혼까지 붙잡아 놓기 위한 바로크 예술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시작은 로마 바티칸에 자리 잡고 있던 성 베드로 대성당이 그 무대가 되고 대성당의 실내 를 장식했던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또는 줄여서 잔 로렌초 베르니니로 불리는 조각가이자 건축가 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유로화 이전 이탈리아 5만 리라 화폐 인물이었던 베르니니]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1532~1602)와 폰타나(Domenico Fontana, 1543~1607)가 교황 식스토 5세(Papa Sisto V, 1585~1590)의 치세 마지막인 1590년에 대성당 의 중앙 돔 일명 큐폴라를 완공한 이후 1624년에서 1633년 사이에 드디어 바로크 장식예술의 서막 을 알리는 베르니니의 발다키노《성 베드로의 발다키노, Baldacchino》가 만들어진다. 베르니니의 발다키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핵심적 공간인 성 베드로 무덤 위에 세워져 있어, 교황만 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교황의 제대를 장식하기 위해 들어선다. 이 차양 장식물을 기점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은 르네상스와 마니에리스모를 거쳐 바로크의 시대로 들어선다. 베르니니의 발다키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한 이들의 시야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장식물 이기도 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과 베르니니의 발다키노, Baldacchino, 1624~1633》

 

당시 우르비노 8세(1568-1644) 교황 아래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실내 디자인과 대성당 앞 광장 을 조성하는 일을 책임졌던 베르니니의 역작 중 하나인 이 장식물은 바로크 장식예술의 특징인 화려 함과 웅장함 그리고 역동성이 무엇인지를 한눈에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앞선 칼럼에서 알아본, 니콜로 아마티의 바이올린 스크롤에서 봐왔던 역동적인 곡선미가 건축으로 전이된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나선형 기둥 모습에서 그 역동성이 확인된다.

 

 

베르니니 자신이 이 나선형 디자인은 인간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밝혔 듯이 나선형 기둥의 화려함은 당시 조화, 비례, 질서의 정결한 느낌의 르네상스 예술에 관한 곡선미 의 반격으로 평가되면서 크게 주목을 받는다. 이 나선형 기둥 양식은 당시 다른 어떤 건물이나 장식물들보다도 바로크 건축의 형상을 미리 예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제 예술은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의 여파로 다소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느낌의 16세기 매너리즘 시대 를 벗어나 로마를 중심으로 신자들의 종교적 이탈을 두려워한 로마 가톨릭 세력에 의해 17세기 바로 크 예술은 철저히 종교적 수단으로써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즉 자신들의 신자들을 강력하게 붙잡아둘 목적으로 극도로 화려함과 웅장함이 함께 강조되는 예술인 바로크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예술은 르네상스 시대 선원근법이 선보인 직선미에서 벗어나, 마니에리스모의 과장된 아름다움 을 역동적 느낌으로 승화한 바로크 예술의 화려한 곡선미와 건축물 규모의 거대함을 통해 건축물을 바라볼 때 순식간에 압도당하는 웅장함을 추구하는 예술의 시대가 열린다.

 

성 베드로 대성당 역시 건축물 규모에서 길이 220m, 너비 150m, 높이 138m로 성당 건축 중 가 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막상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그 규모를 쉽게 가늠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실내 장식물들의 규 모가 모두 다 너무 큰 나머지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다음의 발다키노 구역 안으로 명동 성당 전체가 쏙 들어가지만, 거대한 발다키노와 엄 청난 규모의 벽체와 벽체를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조형 장식물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실제 크기처럼 안 보인다는 점이다.

 

 

이 발다키노 구역 뒤쪽으로 베르니니의 또 다른 작품인 베드로의 성좌 구역이 다음과 같이 화려함과 웅장함을 뽐내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앙의 베드로 성좌 주변으로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아타나시 오의 동상들이 성좌의 다리를 받치고 있는데, 보기에 따라선 크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 크 기는 5m에 육박할 정도의 엄청난 크기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전체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성좌 위쪽 구역을 바라보면 천연대리석을 얇게 깎아 유리처럼 보이는 타원형의 창 안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하늘에서 비치는 빛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으로 연출되어 있는데, 이 역시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작아 보일 수 있지만, 이 비둘기 날개의 폭은 1.75m에 달할 정도로 엄 청난 규모를 자랑하며, 비둘기 주변을 구름처럼 둘러싼 천사 조형물은 청동 75.000kg 가 쓰였으며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하며 경외감을 조성한다.

 

이처럼 근대적 가치관과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색다른 관점으로 바라봤던 르네상스 예술이 이 탈리아에서 발현되어 전 유럽으로 흘러갔듯이, 두 번째 유행인 화려함과 웅장함을 내세워 신자들의 이탈을 경계하며 자신들의 세력권 아래 붙잡아 놓으려는 로마 가톨릭의 염원이 담긴 17세기 바로크 예술의 서막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카라바조와 베르니니에 의해 시작되어 빠르게 전 유럽으로 전파되 기 시작한다.  이제 로마 가톨릭은 다소 검소한 느낌의 프로테스탄트 양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극도로 화려함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후 로마 곳곳에 교황과 추기경들의 궁전과 별장이 들어서고 그곳에서의 호화로 운 생활방식은 교황의 절대권력이 쇠퇴하고 새로운 절대권력으로 급부상한 프랑스 왕실 문화로 침투 하기 시작하며 프랑스 바로크 탄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풍만한 곡선으로 승부를 건 베르니니”

 

니콜로 아마티의 바이올린 스크롤 양식은 그대로 베르니니의 작품성에 영향을 끼친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풍만한 곡선미를 자아낸다. 도나텔로의 다비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베르니니의 다비드를 각각 비교해 보면, 초기 르네상스와 전성기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가 추구한 서로 다른 미적 가치관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먼저 도나텔로의 다비드이다.

 

 

도나텔로의 다비드상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이후 최초로 등장한 청동 전신 남성 누드상이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에 관점에서 인간의 육체 또한 신성시하며,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도로 이전 중세 의 신본주의 가치관에서 탈피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도나텔로의 다비드상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성서에 기록된 어린 목동인 다비드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돌에 맞아 쓰러진 골리앗의 머리를 칼로 벤 후, 왼발로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숨을 가다듬으며 잠시 정적에 싸여 있는 모습이다. 다비드가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는 당대 토스카나 지역 목동들이 흔히 쓰던 모자를 이용해 영웅적인 모습보다는 최대한 목동의 모습으로 연출하고 있으며, 육체는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 모 습의 미성숙한 모습이다. 얼굴의 크기도 어린아이처럼 여겨질 수 있게, 가슴 크기와 비교해 보면 얼굴이 상대적으로 큰 모습으 로 매우 사실적으로 성서 속 어린 다비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에 비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현실보다는 매우 이상적인 비율의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으로 재 현해 내고 있다.

 

골리앗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의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잘생긴 얼굴과 건장한 육체미를 가진 모델 이 흡사 패션쇼 런웨이에서 멋지게 관객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을 자기 자신도 잘 안다는 표정과 이상적인 비례 그리고 카리스마 있는 제스처로 연출된 멋진 피규어 같은 모습이다. 잘 만들어진 피규어가 꼭 장식장 안에 비치된 느낌마저 든다.

 

미켈란젤로는 이 거대한 조각상을 사람들이 아래쪽에서 바라볼 때 다비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을 계산한 나머지 다음의 이미지처럼 얼굴 쪽으로 진행될수록 조각상의 각 부분 비율을 크게 키워 아래쪽에서 바라볼 때 이상적인 비율로 보이게 왜곡 연출한다. 이런 연출은 원근법을 역으로 잘 활용 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런 연출로 인해 얼굴은 관람자 시선에서 위쪽으로 멀리 자리 잡고 있어도 매우 잘 보이며 정상적 인 비율로 보이는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즉 보는 이에게 이상적이며 기하학적 비례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다 큰 청년의 건장한 모습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사실적, 자연주의적 모습의 도나텔로의 다비드]

 

이제 베르니니의 다비드이다. 바로크 장식예술의 대가답게 도나텔로의 자연주의 양식, 미켈란젤로의 기하학 양식과 크게 비교되는 역동적인 모습의 다비드이다.

 

 

도나텔로나 미켈란젤로보다 더욱더 생생한 동작과 함께 작품이 주는 서사까지 느껴지는 현장감을 보 여주고 있다. 이는 마니에리스모가 추구한 과장된 제스처와 함께 바로크의 특징인 풍채 좋은 인물이 뿜어내는 역동적 에너지 가득한 근육질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이 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에서 느껴지는 이상적 아름다움의 근육질과는 차별화된다.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마치 올림픽의 출전한 해머던지기 선수의 육중한 근육의 풍만감의 아름다움으로 되살아나며 살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기세이다. 지금으로 치면 현대판 증강현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베르니니의 사자상 역시 전혀 현실의 실재 사자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지만, 과장된 사자의 뼈와 근육의 모습으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더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사자의 갈기 역시 현실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바로크 시대 귀족들이 착용한 가발에서 느껴지는 가 공된 우아함이 느껴질 정도로 풍만하면서도 섬세하게 곡선미를 잘 살린 모습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비싼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한 사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법하다.

 

 

이처럼 베르니니의 사자상과 함께 앞서 살펴본 세 개의 다비드상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인간은 대체로 예술 작품 감상에 있어, 처음에는 자연주의적이며 사실 재현적인 도나텔로의 다비드상 같은 작품을 좋아하게 되고, 그다음으로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처럼 이상적인 비율의 기하학 양식 을 좋아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베르니니의 다비드상처럼 풍만함으로 인한 육감적 아름 다움과 그 안에 서사가 느껴지는, 즉 한 편의 드라마로 다가오는 바로크 양식에 반응한다는 점이다.


“예술사는 언제든 본질을 유지한 채 형태만 바뀌며 재탄생한다.”

 

서양 예술사는 이처럼 인간의 기호와 욕망을 충족하며 매우 본능적으로 인간의 시선을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전한다. 17세기 로마 가톨릭도 이 사실을 무척 잘 알았었다는 점을 지금 의 우리가 상기할 필요가 있다. 로마에서 시작된 바로크는 이후 프랑스 왕실로 전해지며, 현재도 여전히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명품의 기원이 되는 프랑스 왕실 애장품들로 다시 태어나 프랑스 바로크를 꽃 피운다. 프랑스 바로크 역시 베르니니가 로마에서 선보인 풍만하고 유려한 곡선미를 애용하게 된다. 이후 바로크적 곡선미는 유럽 사회에서 귀족적 성격으로 규정된다. 이런 이유로 전통적으로 유럽 사회 귀족이나 부르주아들의 애장품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다음 의 17세기 마차 디자인에서 볼 수 있듯이 바로크적 곡선미로 디자인된 제품을 더 선호한다는 점이 다.

 

 

특히 17세기 유럽 범선의 단면은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만들어진 아마티 가문의 바이올린 형태와 같은 풍만한 곡선미를 자랑한다. 이렇게 나무를 휘게 만드는 일은 당시에도 보통 일이 아니었음에도, 17세기 영국 해군이 건조한 전 열함은 바로크적 곡선미로 제작된다. 이 디자인은 아름다울뿐더러 전장에서도 함선의 속도와 항해 안정성에 있어 뛰어난 성능이 확인된 이후 모든 유럽의 범선들은 이후 이 영국 해군의 전열함 디자인을 따라 건조한다.

 

 

최고의 아름다운 순간에 최고의 성능이 찾아온다는 엔초 페라리의 명언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처럼, 17세기 유럽은 종교개혁과 신·구교 간의 종교전쟁이 끝난 후 찾아온 평화의 시대를 로마 가 톨릭과 그 영향권에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에서 화려하고 웅장함을 자랑하는 예술의 시대인 바 로크 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이 시대의 산물들은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Federico Damaso Pareto, 1848~1923)에 의해 ‘귀족 마케팅’이라는 경제 원리로 재정립되며, 지금도 우리 삶에서 우 리의 시선을 단번에 끄는, 혹은 왠지 고급스러워 보여 지갑을 열고 싶은, 즉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 고 있는 소유욕을 단번에 건드는 요소로 생생하게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 다. 교황과 왕 그리고 귀족이 좋아했던 것들은, 명품이란 이름으로 진화해 우리의 시선을 빼앗으며 여전 히 비싼 가격에 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