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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리뷰] 리뷰: 제17회 ARKO 한국창작음악제 - 국악 부분

2026년 1월 27일(화)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K-Classic News 리뷰 성용원 |

 

 

 

발표 작곡가와 작품명: 강한뫼 - 파묵, 유재영 - 8개의 소품, 서민재 - 영고재, 이고운 - 대금과 관현악을 위한 '숨, 생, 시', 김지호 - 기억의 노래(재연)
이승훤 지휘 &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대금 협연: 김정승

 

발표된 곡과 그러지 못한 곡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고 위치가 바뀔지 누가 아는가? 

 

"여기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는 지금 이 시대에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서 직면한 질문이자 아창제가 품은 함의일 것이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서 있던 곳은 어디였나?"와 함께 "과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맞나?"라는 근원도 포함되어 있다.

 

무엇을 듣고 싶은지 결정하는 주체가 청중이요 대중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특히 순수예술이라는 분야에서는 고등 예술 음악으로 표상하길 원했던 이들에 의해 학계와 평단이 그걸 결정해 버렸다. 학계, 평단, 주요 기관은 음악 취향의 결정권자가 되어 자기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음악을 선별하였다. 이는 오늘의 아창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선정되지 못한 수많은, 수백 편의 작품들은 그저 수장고에 처박혀서 편견 없이 세상과 만날 날만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데 이중 오늘 발표된 곡과 그러지 못한 곡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고 위치가 바뀔지 누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청중들이 원하는 음악은 감추어진 시대 상황은 누구의 책임? 

 

올해 국악 분야에서는 44작품이 출품되어 다섯 개를 실연으로 올렸으니 9 대 1의 경쟁률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작품들이 꼭 예술성과 작품성이 뛰어나 연주되기 위해 간택되었는가 자문하며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다. 동시대 음악이라는 폭넓은 범주에서의 포용이 아닌 현대음악(Contemporary Music)이라는 어구로 끼리끼리와 고립만 가속화 시킨 여론 형성자 또는 엘리트 학자들은 예술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음악 청중은 자신들이 속한 시대의 음악에 우선 노출되지 못하는 역사상 최초의 세대가 되고 말았고 사회가 규정한 예술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수동적인 자세만 취하게 되어 의사결정권이 상실되어버렸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고 즐길 수 없는 음악을 강요받은 청중은 본인이 영리하지 못하거나 현대음악 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해 조예가 부족하다고 자책하고 괴로워하면서 개탄한다. 이는 교회에서 시험에 들어 힘들어하는 성도에게 "넌 신앙심과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라는 야단과 주입과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좋은' 음악인지는 누가 결정하나?

 

거칠 것 없는 크로스오버와 완전한 자의성이 지배하는 지금, 록과 재즈뿐만이 아니라 때론 실험적인 분야에도 포스트모던이라는 치트키로 찬양받는 융합과 다원주의로 인해 “무엇이든 다 된다”라는 원칙 없는 원칙에 따라 가능한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섞고, 인용하고, 가장하고, 패러디하고, 콜라주하고 기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정작 과거의 재료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마당에 확대된 자유의 영역에서의 자의성은 깊숙이 침투해 모든 걸 집어삼키고 있다. 

 

한국 작곡가니 국악이네 양악이네 이분법 무의미

 

K-Pop으로 상징되는 K-Culture로 세계를 선도하는 문화 종주국으로 대한민국이 우뚝 선 마당에 지엽적인 사고와 지역으로 국악이라는 걸 한정해서 한국적인 색채네, 우리 고유의 소리네, 민족성 따위의 케케묵은 철 지난 담론을 들먹이자는 게 아니다. 오늘 발표한 다섯 명의 작곡가들은 모두 국악기를 위해 곡을 쓰는 한국 작곡가요 그들을 가르치고 평가하고 심사한 사람들 태반이 양악을 전공하고 서양음악 아방가르드를 금과옥조로 신봉하다가 넘어오고 건너온(필자 포함) 피아노, 바이올린을 위한 곡을 쓰는 한국 작곡가니 국악이네 양악이네 구분하는 건 무의미해졌다. 서양음악의 작곡 기법을 국악기로 이식한 결과 이걸 그대로 서양 오케스트라가 연주한다고 해도 별 차이가 없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혼돈 그 자체를 유발 

 

강한뫼의 <파묵> 마지막 코다에서의 순차적인 상향 음정에 튜티 이후 타악기의 종이 한번 울리면서 마감하는 건 전형적인 고전 양식이며, 이고운의 대금 협주곡은 현란하고 기교 과시적인 낭만 협주곡의 형태로 대금 대신 플루트가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중교배이다. 유재영과 서민재에게는 곡을 쓰기 위한 동일한 레퍼런스와 템플릿이 역력했으며 김지호의 <기억의 노래>는 음악극이나 창극의 부수음악으로 어울릴만 했다. 작곡가들이 현재 속해있는 상황과 위치, 영역과 단체에 따라 스타일이 규정되었다. 철저히 구조화된 작곡 방식으로 음의 배열, 셈여림, 음가, 음표 각각의 어택까지 통제했던 음렬주의가 존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과 같은 결과의 사운드를 발생한다는 건 비균등 리듬을 기반으로 한 혼합박자와 황종과 임종 계면조가 소리와 울림의 결과에서는 독창성과 개성보다는 유사성의 흔적이라는 의심까지 불러온다는 거와 같았다. 끊임없는 실험과 재실험은 ‘모든 것을 가지고픈’ 욕망과 성공의 의지이며 사실 예술가에는 ‘모든 것’이 별 쓸모가 없다는 진리를 발견하게끔 한다. 자기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찾은 이후의 음악은 혼동하고 싶어도 혼동할 수가 없는데 오늘의 작품들은 혼동 그 자체로 국가 기관에서 공모전으로 선발된 작품에 공정성과 작품성 논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으니 이 자체가 "미래가 기억할 오늘의 우리 음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각종 시상,위촉이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현상은 누구의 책임? 

 

유린당한 도덕과 노골적인 거짓을 서슴지 않으면서 작품이 작가의 양심의 판 출세의 수단이 되어버리면 안 된다. 상을 받고 주요 단체의 위촉으로 탄생한 저마다 세계 초연을 무대를 거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만, 2000년대 이후 이렇게 이어온 아창제를 비롯 수많은 창작음악 발표회 이후 여전히 연주회에 올려지고 방송에서 송출되고 스트리밍 되면서 소비되고 있는 작품이 있는가? 상을 받고 보조금의 뒷배를 얻어 세상에 나온 작품들이 사라지는 현상이 오직 작곡가들의 책임인가?

 

자신이 속한 시대 혹은 역사적 소용돌이, 선조 등과 맺은 관계로 인해 모든 예술작품은 저마다 간단히 축약하고 간과할 수 없는 독자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생산된 시대의 일부로 치부된다. 서로 다른 음악적 전통이 만나 새로운 형태로 재해석되는 현상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음악의 본질적인 확장과 실험을 보여주며 이걸 초월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시대와 불화하는 인물들은 모방적이거나 극적인 효과를 염두에 두지 않으며 독자적인 길을 걷고 "미래가 기억할 오늘의 우리 음악"을 창작할 것이다.

 

 2010년 아창제의 모체인 제3회 창작관현악 축제 때, 당선된 작품의 연주가 끝나고 로비에서 몇몇의 감상자들이 미국 작곡가 존 코릴리아노(John Corigliano)의 교향곡 No.1과 너무 유사하다고 수군거렸다. 심지어 개중엔 그 사람에게 수학한 제자들도 있었고 그 곡으로 논문을 작성한 사람들도 있어 의혹이 가중되어 결국 조사 결과 베낀 게 드러났다. 그리고 1년간 우여곡절을 겪고 2012년부터 ARKO한국창작음악제라는 이름의 4회로 재탄생하였다는 사실을 적시하며 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