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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리뷰] 푸치니 '나비부인', 사랑의 서정 뒤에 남겨진 침묵

푸치니 '나비부인' 아름다운 음악, 잔혹한 서사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공연 성료

K-Classic News 부산=오형석 기자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은 초연 이후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반복되어 왔다. 이 작품은 흔히 ‘가장 아름다운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가장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오페라이기도 하다.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무대에 오른 이번 '나비부인'은, 이 작품이 여전히 현재의 관객에게 유효한 윤리적·역사적 질문을 던질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나비부인'은 일본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미국 해군 장교 핑커턴과 일본인 소녀 초초상의 관계를 그린다. 그러나 이 서사는 애초부터 ‘사랑’이라는 단어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구조 위에 놓여 있다. 핑커턴은 서구 제국주의의 확장 국면 속에서 일본에 파견된 군인이고, 초초상은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상실한 15세의 소녀다. 두 사람의 만남은 개인적 감정의 영역에 앞서, 권력과 불균형이 전제된 관계다.

 

푸치니는 이러한 불균형을 정면으로 고발하기보다는, 음악적 서정을 통해 비극을 감싸는 방식을 택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비부인'은 아름다움과 폭력성이 동시에 작동하는 복합적 텍스트가 된다. 관객은 초초상의 순수함에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그 순수함이 어떻게 착취되고 파괴되는지를 목격한다.

 

작품의 원제 'Madama Butterfly'에서 ‘Butterfly’는 주인공 초초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일본어로 '나비'를 뜻하는 '초초'라는 이름은, 가볍고 아름답지만 쉽게 짓밟히는 존재를 암시한다. 푸치니는 이 상징을 통해 주인공의 운명을 처음부터 규정한다. 나비는 날아오르기 위해 태어났지만, 이 작품 속에서 그것은 결국 핀에 꽂힌 표본처럼 박제된다.

 

1막에서 핑커턴은 중매인 고로를 통해 초초상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가볍다. 그는 이미 미국에 '진짜 결혼'을 할 여성이 있음을 숨기지 않으며, 이 결혼을 일종의 계약 혹은 유희로 받아들인다. 반면 초초상에게 결혼은 삶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꾸는 선택이다. 그녀는 핑커턴을 위해 종교를 바꾸고, 그로 인해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단절된다. 이 순간 초초상은 사랑을 선택하는 동시에,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로부터 추방된다.

 

이 장면에서 주목할 것은 푸치니의 음악이다. 그는 초초상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감정을 섬세한 선율로 감싸며 관객이 그녀의 시선에 감정 이입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초초상을 보호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녀를 더욱 취약한 존재로 만든다. 음악은 연민을 만들어내지만, 구조를 바꾸지는 않는다.

 

2막은 '나비부인'의 정서적 중심부다. 핑커턴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초초상은 아이를 키우며 오직 ‘기다림’으로 삶을 버텨낸다. 이 기다림은 흔히 순애보로 해석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선택지가 제거된 상태에서 강요된 시간이다. 초초상은 돌아갈 가족도, 자립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도 없다. 그녀에게 기다림은 사랑의 표현이기 이전에 생존의 유일한 방식이다.

 

이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아리아 '어느 개인 날(Un bel dì vedremo)'은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다. 초초상은 핑커턴의 귀환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노래하지만, 관객은 이미 그 믿음이 환상임을 알고 있다. 이 극적인 아이러니는 감동과 불안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푸치니는 희망의 음악을 통해 절망을 예고한다.

 

미국 영사 샤플레스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중간자적 인물이다. 그는 핑커턴의 무책임함을 인식하고 있으며, 초초상에게 진실을 전하려 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샤플레스의 침묵은 개인의 선의가 구조적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상징한다. 그는 공감하지만 행동하지 못하고, 그 결과 비극은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3막에서 비극은 현실이 된다. 핑커턴은 미국인 아내 케이트와 함께 돌아오지만, 초초상과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는 아이를 데려가려는 목적만을 남긴 채, 책임을 회피한 상태로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 장면에서 핑커턴은 더 이상 낭만적 연인이 아니라, 폭력의 결과만을 수습하려는 비겁한 가해자로 남는다.

초초상이 선택하는 죽음은 이 작품의 가장 논쟁적인 지점이다. 그녀는 아이에게 장난감과 성조기를 쥐여주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 행위는 개인적 절망의 표현이자, 동시에 자신을 파괴한 세계에 대한 마지막 응답이다. 성조기는 보호와 문명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초초상에게 그것은 자신의 삶을 무너뜨린 권력의 표식이다. 아이를 남기고 떠나는 선택은 모성의 포기가 아니라, 더 이상 이 세계에서 자신이 설 자리가 없음을 인정하는 선언에 가깝다.

 

뒤늦게 무대로 돌아온 핑커턴이 외치는 "Butterfly!"는 참회의 언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절규는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가능해진 감정이다. 푸치니는 이 장면에서 핑커턴에게 음악적 클라이맥스를 허락하지만, 그 감정은 결코 초초상의 죽음을 되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 없는 후회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드러낸다.

 

한편 이번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공연은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이 작품이 여전히 강력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1막의 설명적 전개는 현대 관객에게 다소 느리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는 이후 펼쳐질 비극을 위한 필연적인 축적 과정으로 기능한다. 2막과 3막에 이르러 음악과 드라마는 밀도 있게 결합하며, 초초상의 심리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나비부인'은 더 이상 단순한 멜로드라마로 소비될 수 없는 작품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폭력, 문화적 우월성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오페라다.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 작품을 다시 무대 위에 올리는 일은, 과거를 기념하는 동시에 현재를 성찰하는 행위다. 푸치니의 음악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