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노유경 리뷰] "브라보 영희, 브라보 영희!!"

저항의 분노에서 위로의 목소리로/ 베를린과 뮌헨 공연

 

K-Classic News 노유경 평론가 기자 |

[노유경 리뷰]

베를린 (9월 23일, 필하모니 대공연장)

뮌헨 (9월 25일, 레지덴츠 헤라클레스잘)

부산시향 독일 공연, 지휘: 홍석원

 

브라보 영희, 브라보 영희 — 저항의 분노에서 위로의 목소리로

 

『소리』에서 시작된 역사

 

“『소리』의 초연은 예외였다.” 슈테판 호프만은 1980년 10월 23일자 『디 벨트』에서 도나우에싱엔 현대음악제를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인  작곡가 박영희의 『소리』는 무해한 민속주의가 아니라 억눌린 민중의 분노를 음악으로 응축하여,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절규로 폭발했다. 그순간 청중은 처음이자 사실상 유일하게, 전원 일어나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당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소리』의 초연은 단순한 신작 발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자 한국인의 목소리가 세계 현대음악제 한가운데서 울려 퍼진 기념비적 순간이었다.

 

2025년 9월, 베를린 필하모니의 Musikfest Berlin 주요 무대는 그 순간을 다시 불러왔다. 부산시립교향악단(지휘: 홍석원)이 재독작곡가 박영희(Younghi Pagh-Paan)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특별한 연주회를 열었다. 박영희는 독일 음악대학 최초의 여성 작곡 교수로 임용된 인물이자, 유럽 현대음악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한국 출신 작곡가이다. 필자는 그녀를 이미 여러 차례 “한국 현대음악의어머니”라 불렀다. 그 호칭에는 그녀의 공적과 영향력이 충분히 담겨 있으며, 한국과 독일의 음악사에 기여한 수많은 이유가 있기에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또한 그녀는 윤이상과 더불어 한국-독일 음악 교류사에서 독자적 위상을 이루었다.

 

실제로 1974년 독일 유학 이후, 평생을 유럽에서 활동해온 박영희는 동서양의 음악 전통을 넘나드는 독자적 작품세계를 구축했으며,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으로서 세계 현대음악의 중심 무대에 새로운 목소리를 제공해왔다. 이번 음악회는 그녀의 대표 관현악 작품 두 곡, 『소리 Sori』(1980)와 『여자여, 왜 울고 있습니까?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2023)를 라벨·메시앙·시벨리우스의 작품들과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박영희의 음악적 여정과 미학을 다층적으로 조명하려는 기획 의도를 드러냈다. 전자는 19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공기를 담아낸 저항적 울림으로, 농악과 향두가의 흔적 속에서 집단적 정서와 억눌린 감정을 드러냈다. 반면 후자는 성서의 마리아 막달레나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고통을 통해 길어 올린 위로와 평온을 담았다. 

 

두 작품은 한 작곡가의 긴 여정을 응축하면서, 사회적 분노와 개인적 치유라는 두 축을 선명히 대비시켰다. 무엇보다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브레멘에서 베를린까지 직접 방문하여 청중과 함께 한, 작곡가의 존재가 감동을 더했다. 무대가 끝나고 휠체어에서 가까스로 일어나 관객을 향해 인사하는 순간, 베를린 필하모니 전체가 다시 한 번 기립했다. 이 기립박수는 단순한 예우가 아니라, 한 예술가가 걸어온 길과 그 음악이 우리에게 준 위로에 대한 경의였다.

 

『소리 Sori』(1980): 한국적 소재와 저항의 미학

 

Musikfest Berlin의 주요 무대는 박영희의 『소리』로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도나우에싱엔 현대음악제(Donaueschinger Musiktage)에서 초연되어 국제적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된 작품으로, 당대 유럽 청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실제 초연 당시 기립박수를 좀처럼 하지 않던 독일 청중들마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갈채를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영희는 이 작품에 한국 전통 소리의 이미지를 현대적 관현악 어법으로 담아내면서, 이를 통해 고국의 사회적 현실과 역사적 정서를 예술적으로 표출하고자 했다.

 

『소리』의 미학적 특징은 한국적 음악 소재와 현대 아방가르드 기법의 독창적 융합에 있다. 작품 곳곳에는 한국 전통음악의 색채가 스며있다. 특히 농악과 향두가 같은 민속음악 요소가 중요한 토대가 된다. 농악은 농촌 지역에서 타악기와 피리, 춤과 가면극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로, 악기를 울려 마을의 액을 쫓고 신에게 감사와 기원을 드리는 의식이다. 박영희는 그 역동적 리듬과 타악 퍼포먼스를 서양 관현악 어법으로 재해석해, 장대한 음향의 흐름 속에 토속적인 활력을 불어 넣었다. 반대로 슬픔과 통곡의 정서를 담은 전통 장례 의식 음악, 곧 향두가·상두소리의 느린 선율은 작품의 고요하고 애잔한 대목에서 관현악 속 멀리서 들려오는 곡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이러한 한국적 소재들은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추상화된 형태로 변모해 작품 전반에 문화적 뿌리로 살아 숨 쉬며, 독일 청중에게 신비로운 울림을 전했다. 그러나 이 곡이 쓰인 1980년 한국의 현실을 떠올리면, 단순한 미학적 실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해 한국 사회에는 끔찍한 사건들(5·18 민주화운동)이 이어졌고, 억눌린 분노와 한이 가득했다. 박영희는 이러한 시대적 정서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들려오는“관현악으로 덧입힌 곡소리” 속에 담아낸 것이다.

 

『소리』의 음향 속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마치 해금의 기법을 재현하는 듯한 순간이 들린다. 예컨대 음을 눌렀다 푸는 압현(라–솔–라, 라를 짚다가 힘을 순간 눌러 솔로 꺾어 내리는 움직임)이나, 높은 음에서 손가락을 살짝 풀며 내려오는 퇴성(본음을 낸 뒤 점차 소리를 거두어 들이며 여운을 남기는 장식, 라에서 솔로 여운을 남기며 내려가는 장식)의 효과가 관현악 안에 스며 있다. 이는 단순한 서양식 음향 기법이 아니라, 박영희가 청주 어린 시절, 집 앞에 와서 해금을 연주하던 거리 악사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그 기억이 작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되살아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소리』의 또 다른 핵심은 억압된 분노의 정서를 음악으로 구현한 데 있다. 박영희는 이 곡의 “감정적 원천은 한(恨)에 가까운 ‘분노’”라고 밝힌 바 있는데 실제 음악에서는 겉으로 직접적으로 표출되지 않는 응축된 긴장과 폭발 직전의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감돈다. 작품 도입부의 잔잔한 호수나 바다를  연상케 하는 음향 속에서도 어딘가 불안한 기류가 흐르고, 현과 목관의 음들이 미세한 떨림과 흔들림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러다가 중반에 이르러 무작위적(알레아토릭) 대폭발이 일어나는데, 이 혼란스럽고도 강렬한 소리의 폭풍은 잠재되어 있던 분노가 순간적으로 분출되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 폭발적 클라이맥스는 1980년 대한민국의 비극적 현실을 은밀히 혹은 노골적으로 비유한다. 실제로 작곡가는 이 부분에 자국의 군부독재가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사건에 대한 응축된 울분을 담았다고 했다. 당시 서구 청중들은 그 정치적 함의를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소리의 에너지에 놀랐을 뿐이었다. 이처럼 『소리』는 개인적·민족적 ‘한’과 저항정신을 관현악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음악이 미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시대에 대한 증언과 내적 절규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부산시향의 연주는 이러한 『소리』의 내재된 힘을 인상적으로 되살려냈다. 홍석원 지휘자의 지휘 아래 오케스트라는 초반의 미묘한 음색 변화와 정적(靜寂) 속 긴장감을 세심하게 표현하여, 청중의 귀를 서서히 집중시켰다. 이어지는 점진적 고조 과정에서 각 파트는 한국적 리듬의 맥박과 서양 현대음악 특유의 음향 질감을 균형 있게 융합하며, 마치 한편의 음악적 판소리 굿판을 펼치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특히 중반 클라이맥스에서의 꽹과리와 장구를 연상시키는 리드미컬한 타격과 금관의 폭발적 울림이 한데 어우러져 소리의 장관을 빚어냈다. 그 순간 베를린 필하모니의 울림은 45년 전 도나우에싱엔의 전율을 재현하듯 벅찬 에너지로 가득 찼고, 한국적 모티브가 세계적 음악공간 속에서 보편적 감동의 순간으로 승화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작품이 끝난 후 공연장에는 잠시 숙연한 침묵이 흘렀고, 곧 이어 터져나온 뜨거운 박수는 초연 당시와 다름없이 이 역작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듯했다.

 

 

『여자여, 왜 울고 있습니까?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2023): 영적 성찰과 위로의 소리

 

이어 연주된 이 작품(세계 초연 2023, 도나우에싱엔)은 전작 『소리』와는 사뭇 대조적인 영적·관조적 세계를 펼쳐 보였다. 제목은 신약성서 요한복음(20장 15절)에서 부활한 예수가 무덤가의 마리아에게 건넨 말에서 따온 것이다. 예수는 슬픔에 잠겨 우는 마리아에게 “여자여, 왜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부르며 그녀의 이름을 불러 위로하고 새로운 힘을 준다. 박영희는 이 작품에서 그 부활 서사의 종교적 교리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울부짖는 인간의 고통과, 그를 위로하는 목소리를 음악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실제 작곡가는 “고통 속에서 울고 있는 사람이 용기를 되찾고 삶의 힘을 찾는 실존적 위로”에 이 작품을 헌정했다고 언급했다. 이는 평생 억압받는 자들과 아파하는 이들에게 공감해온 예술가로서, 이제 여든의 나이에 이르러 세상에 보내는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로 읽힌다. 필자는 이 작품의 도나우에싱엔 초연(2023) 현장을 직접 참여했다. 그때의 음악은 고통 속에서 길어올린 위로와 평온이었다. 이번 베를린에서 다시 들은 이 작품은 한지의 반투명한 은은함 같은 음색이 현악과 금관을 통과하고, 마지막에 잔향처럼 남는 타악기의 소리가, 분노가 위로로 승화되는 과정을 상상하게 했다.

 

음악적으로 『여자여, 왜 울고 있습니까?…』는 짧지만 7분간의 깊은 울림이다. 앞서 연주된 『소리』가 분노의 내재적 에너지로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았다면, 이 곡은 비탄과 위로가 교차하는 정제된 명상의 세계를 펼친다. 도입부에서 현과 목관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화음들은 마치 새벽 무덤가의 안개와 고요한 공기를 닮아 있다. Lento한 느린 진행 속에 미묘하게 겹쳐지는 화성들이 한없이 잔잔한 호흡을 형성하며, 마리아의 눈물과 한숨이 환청처럼 스민다. 이어 중간에 이르러 금관이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대목에서는, 마치 부활한 존재(예수)의목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코랄(chorale) 풍의 경건한 선율이 나타난다.

 

그 선율은 절제된 볼륨으로 울리며, 오케스트라는 그 위에 내적 빛(투명성)을 심어준다. 이 부분에서 지휘자 홍석원은 균형 잡힌 다이내믹 컨트롤을 통해 과도한 감상에 빠지지 않는 품위 있는 울림을 끌어냈다. 마지막 부분에서 음악은 극적인 클라이맥스 없이 다시금 고요속으로 가라앉는다. 높은 현의 가느다란 떨림과 맑은 타악기의 잔향이 남고, 이는 마치 눈물 뒤에 찾아온 평온처럼 느껴졌다. 작품은 그렇게 “고요와 내적 힘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고 청중들은 한동안 숨소리조차 쉬지 않은 채 깊은 여운에 잠겼다.

 

『소리』와 이 『여자여, 왜 울고 있습니까?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를 연이어 들어 본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동일한 작곡가의 두 시기가 이렇게나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놀라움과 함께, 그 변화를 관통하는 일관된 정신도 발견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극과 극이다. 전자는 토속적 소재와 사회적 분노를 불길처럼 내포한 작품이고, 후자는 성경적 모티브와 영적 성찰을 물결처럼 담담히 어루만진다. 그러나 두작품 모두에서 ‘울음’과 ‘목소리’의 주제가 핵심으로 자리하며, 이는 억압에 저항하는 인간의 울부짖음과 슬픔을 치유하는 위로의 목소리라는 상호보완적 메시지로 읽힌다. 젊은 시절 박영희가 『소리』를 통해 조국의 비극에 맞서 진실의 소리를 외쳤다면, 원숙한 거장의나이에 이른 그는 『여자여…』를 통해 전 인류의 고통에 공감하며 치유의 소리를 건네는 듯하다.

 

이러한 변화는 그녀의 개인사와 신념의 궤적과도 닿아있다. 실제로 가톨릭 신앙을 가진 박영희는(소피아) 세월과 함께 종교적·철학적 탐구를 심화시켜 왔고 음악에서도 보다 보편적이고 내면적인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 하지만 변함없는 것은 약자와 여성에 대한 연대 의식이다. 젊은 시절에는 군부 독재하 민중들의 한을 대변했고, 이제는 “울고 있는 여성들”을 떠올리며 작품을 바치는 그녀의 시선은 예술가로서 일관된 휴머니즘과 페미니즘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두 작품은 방향은 달라졌어도 뿌리는 같은 나무처럼, 박영희 예술세계의 큰줄기를 형성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함께 연주된 작품들의 맥락과 의미: 라벨·메시앙·시벨리우스

 

이번 음악회 프로그램의 독특한 측면은, 박영희의 작품들과 함께 20세기 전반의 주요 관현악 작품들이 한 무대에서 연주되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Concerto pour la main gauche, D장조)》(1930), 올리비에 메시앙의《L’Ascension(승천)》— 네 개의 관현악 묵상(1933), 그리고 장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 C장조(1924)가 박영희의 두 작품과 나란히 연주되었다. 얼핏 보기엔 동시대성이 전혀 다른 레퍼토리들이지만, 기획 의도를 곰곰이 음미해보면 이들 작품이 다층적 대화를 이루며 박영희의 작품들을 보완하고 해석하는 맥락을 만들어 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라벨의 왼손 협주곡은 1부의 마지막 순서로 박영희의 두 작품에 이어 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 폴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라벨이 작곡한 협주곡으로, 상실과 극복이라는 인간 경험이 내포된 곡이다. 부산시향과 피아노 독주자 벤 킴(Ben Kim)은 이 곡에서 라벨 특유의 재즈적 리듬과 어두운 관현악 색채를 살려내며, 앞서 연주된 『소리』의 격정에 뒤이어 또 다른 형태의 비극미를 드러냈다. 특히 협주곡 도입부의 저음 현과 콘트라바순의 음울한 울림, 그리고 피아노가 홀로 노래하는 쓸쓸한 선율은, 『소리』에서 느껴졌던 한과 통곡의 정서와 묘하게 공명을 이루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피아노가 화려한 기교와 강인한 의지로 역경을 돌파해 나가는 모습은, 박영희의 음악이 보여준 집단적 한(恨)의 분출과는 결이 다른 개인적 극복의 드라마를 들려주었다. 결과적으로 이 협주곡은 1부를 마무리하며, 고통에서 희망으로 향하는 예술의 힘이라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전달했다. 

 

2부의 첫 곡으로 연주된 메시앙의 《L’Ascension》은 프로그램의 영적 대화를 한층 심화시켰다. 네 개의 교회적 명상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예수가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는 승천의 장면을 묵상적으로 그린 것으로, 심오한 신앙심과 황홀한 관조로 가득한 음악이다. 3악장“나팔과 심벌즈의 알렐루야”에서 금관과 타악의 광휘, 이어 4악장 “그리스도의 기도”의 장엄한 현과 목관의 응집력은 앞선 작품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초월적 환희를 선사했다. 부산시향의 연주를 들으며, 필자는 문득 파리의 한 성당에서 보았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떠올렸다. 메시앙이 오르가니스트로 평생 봉직했던 라 생트 트리니테 교회(Église de la Sainte-Trinité)의 찬란한 코발트 창문처럼, 이 음악도 빛과 색채의 조각들이 모여 영적전체성을 이루고 있었다.

 

연주의 대미를 장식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은, 전체 프로그램에 하나의 철학적 마침표를 찍는 선택이었다. 단일 악장으로 독특한 형식 속에 인생의 희노애락과 자연의 순환을 담아낸 이 작품에서, 트럼본의 장중한 주제는 인생의 히한과 긍지를 담은 선언처럼 퍼졌다. 변주와 응축을 거쳐 마지막 찬란한 C장조 화음으로 수렴될 때, 갈등이 해소되고 새로운 빛이 솟구치는 듯했다. 이 순간은 마치 『여자여…』가 전달한 위로의 감정이 상승하여 형이상학적 깨달음에 이르는 것처럼 다가왔고, 동시에 『소리』의 격렬했던 한의 정서까지도 거대한 자연의순리에 용해되어 승화되는 듯한 울림을 주었다.

 

 

현장의 기록: 베를린과 뮌헨

 

베를린 필하모니는 축제의 광장이었다. 공연 후,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 임상범이 무대 위로 올라와 박영희에게 꽃을 전했다. 청중은 휠체어에 앉아 있던 작곡가 박영희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인사하는 순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 장면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역사적 증언이었다.

 

이틀 뒤, 뮌헨 레지덴츠의 헤라클레스잘(Herkulessaal)에서 같은 작품들이 연주되었다. 여기에 『높고 깊은 빛』(2011)이 바이올리니스트 강별, 비올리스트 닐스 멘케마이어의 협연으로 더해졌다. 청중의 규모는 베를린 만큼 크지 않았지만, BR의현대음악 시리즈 musica viva답게 더 집중된 청취가 가능했다. 베를린이 국제적 환호라면, 뮌헨은 서재 속 고요한 응시였다. 두 도시의 차이는 분명했지만, 울림의 본질은 같았다.

 

박영희가 한때 강조했듯 “예술가는 귀와 눈을 열어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그녀의 신념은 오늘 무대에서 생생한 현실로 나타났다. 『소리』의 저항의 목소리와 『여자여…』의 위로의 목소리, 그리고 라벨·메시앙·시벨리우스가 들려준 인간 정신의 다양한 얼굴들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는 음악을 통해 역사를 듣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체험을 했다. 이는 리뷰를 마치는 지금까지도 가슴 깊이 울리고 있는 울림이며, 박영희의 음악이 앞으로도 우리에게 던질 예술적, 인간적 물음에 대한 기대를 한층 높여준다. 마지막으로, 머나먼 타국의 청중앞에서 자신들의 소리로 이러한 문화적 감동의 순간을 만들어낸 부산시향과 홍석원 지휘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한국 음악계가 나아갈 하나의 밝은 방향을 본 듯한 희망을 함께 기록해둔다.

 

 

울림을 만든 사람들

이 글은 주로 음악 그 자체 — 작품 구조, 연주 해석, 미학적 의미 —에 집중했지만, 이 무대가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많은 보이지않는 손들이 있었다. 독자들이 이 연주회를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공연을 현실로 만든 주요 인물과 조직을 간략히 기록해둔다.

• 지휘자: 홍석원

• 공연 단체: 부산시립교향악단

• 주최 기관: Musikfest Berlin, BR musica viva,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관(대사: 임상범), 주독일 한국문화원(원장: 양상근)

 

박영희의 분노가 위로로 승화된 소리가, 단지 예술적 사건이 아니라 문화교류의 상징이기도 했음을. 그리고 이 상징이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가질 수 있는 목소리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었다는 사실을....

 

“브라보 영희, 브라보 영희.”그 외침에는 음악을 만든 이들과 이를 가능하게 한 모든 손들의 감사와 경의가 담겨 있다.  『유리알 유희』가 말하는 통합적 유희, 곧 예술이 삶을 감싸 안는 순간이었다. 음악은 단순히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는 철학이 되었다.

브라보 영희, 브라보 영희. 감사합니다

 

*이 글은 박영희 선생님의 여든 생신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헌정합니다.

 

 

글: 노유경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음악학박사, 쾰른대학교 출강, 해금앙상블(K-Yul) 음악감독 겸 단장, 독일/서울 거주, 

 

#박영희 #YounghiPaghPaan #소리 #여자여왜울고있습니까 #부산시립교향악단 #지휘자홍석원 #베를린필하모니#MusikfestBerlin #DonaueschingerMusiktage #Ravel #Messiaen #Sibelius #현대음악 #한국현대음악 #노유경리뷰 #노유경율모이 #Hangulmanse #kyul_germ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