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손영미 | 시인, 극작가, 칼럼니스트| 사랑이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 질문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하던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이 질문과 가장 아름답게 겹쳐지는 인물이 칼립소다.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떠돌다 오기기아섬에 닿아 칼립소와 7년을 보낸다. 여신 칼립소는 그를 사랑했고, 그가 머물기를 원했다. 심지어 인간이 끝내 이길 수 없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까지 그의 앞에 놓는다. 아름다운 여신, 풍요로운 섬, 늙지 않는 삶. 사랑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조건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바닷가에 앉아 운다. 그의 눈이 향하는 곳은 칼립소가 아니라 바다 너머의 이타케다. 사랑하는데, 왜 떠나는가 이 장면은 사랑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사랑한다면 곁에 있어야 하는가. 떠난다면 사랑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파고드는 사랑의 역설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사랑에 빠진 인간은 상대만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때로는 상대를 통해 일어난 자기 안의 욕망과 사랑의 상태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 “당신을 사랑한
K-Classic News 손영미 · 시인·극작가·칼럼니스트 가을이 오는 길목, 조금씩 신선해진 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는 유난히 짙은 아련함이 배어 있다.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A Comme Amour〉를 듣고 있노라면, 투명하게 흐르는 아르페지오 위로 가만히 얹히는 선율이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어느 계절의 기억을 두드린다. 프랑스어 제목 A Comme Amour는 직역하면 ‘A는 Amour의 A’, 곧 ‘A는 사랑의 A’ 정도의 의미를 품고 있다. 우리에게는 오래도록 <가을의 속삭임>이라는 제목으로 사랑받아왔다. 원제에는 가을이라는 말이 없지만, 잔잔하면서도 쓸쓸한 그 서정이 가을의 온도와 닮아 있다. 이 아름다운 선율은 연주자인 클레이더만이 직접 작곡한 곡은 아니다. 그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시킨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폴 드 세네빌(Paul de Senneville)과 그의 음악적 동료들이 만들어낸 프렌치 팝 특유의 서정이 담긴 작품이다. 클레이더만의 음악은 정통 클래식의 무거운 형식에서 한 걸음 벗어나 클래식 피아노의 우아함과 대중음악의 친근한 선율을 이어주었다. 그래서 그의 피아노는 거대한 담론을 말하기보다
K-Classic News 손영미 (시인·극작가·칼럼니스트) 지난 8월 5일 국내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연일 박스오피스 정상을 지키며 흥행의 항해를 이어가고 있다. 개봉 9일째인 14일 기준 누적 관객 약 285만 명. 3천 년 전 쓰인 고전이 첨단 영상의 시대에 다시 대중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있다는 사실부터 흥미롭다.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을 마친 영웅 오디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기다리는 고향 이타케로 향한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어도 그의 진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신들의 분노와 거대한 폭풍, 괴물과 유혹, 죽음과 망각이 그의 귀향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트로이에서 이타케까지는 20년을 떠돌아야 할 만큼 먼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호메로스는 왜 한 인간을 그토록 오랫동안 바다 위에 붙잡아 두었을까. 그 질문에서 『오디세이아』는 모험담을 넘어 인간에 대한 철학이 된다. 전쟁의 영웅에서 한 인간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8세기경 성립된 것으로 알려진 서사시다. 『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노래한다면,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뒤 한 인간이 자신의 자리로
K-Classic News 손영미 시인·극작가·칼럼니스트 김현승 시 · 안정준 작곡 노래 | 소프라노 김영미 · 소프라노 김향란 가을 들판이 천천히 무르익어 간다. 하늘에는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바람은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나뭇잎 사이를 지난다. 계절이 이토록 깊어질 때면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김현승의 시에 안정준이 선율을 입힌 <가을의 기도〉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지만, 김현승에게 가을은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시간이었다. 열매가 익을수록 가지는 낮아지고, 나무가 잎을 내려놓을수록 하늘은 더 많이 보인다. 어쩌면 시인은 그 오래된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끝내 배워야 할 겸허를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세 연을 이끄는 ‘~하게 하소서’라는 간절한 어조는 이 시를 한 편의 기도문처럼 만든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엇을 더 갖게 해달라는 청원이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것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가장 본질적인 것만 남게 해달라는 간구에 가깝다. 기도하고, 사랑하고, 마침내 홀로 서는 것. 그 세 단계 끝에 시인은 ‘절대 고독’의 자리로 걸어 들어간다. 김
K-Classic News 손영미 작가| 연일 이어지는 폭염 속에서는 문득 소나기 한 줄기가 그리워진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처럼, 지친 마음에도 잠시 쉬어갈 여백이 필요하다. 사랑도 그렇다. 너무 뜨거우면 서로를 태우고, 적당한 그리움이 있을 때 비로소 오래 머문다. 그래서 그리움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사랑이 깊어지는 또 하나의 계절이다. SJ Park의 섬세한 선율과 정단의 시적인 언어가 만난 <누군가가 그립다〉는 바로 그 계절을 노래한다. 이 노래에서 비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다. 마음 깊은 곳에 차오른 그리움이 하늘을 빌려 흘러내리는 감정의 은유다. “빗물인지 눈물인지”라는 표현은 자연과 인간의 슬픔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그려낸다. 어느새 우리는 비를 맞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사랑했던 그 사람은 선명하게 그려진다.”라는 구절은 기억의 본질을 일깨운다.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얼굴보다 마음을 먼저 기억한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일수록 세월은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고 선명하게 새겨 놓는다. 후반부에 펼쳐지는 겨울과 흰 눈의 이미지는 더욱 인상적이다. 낙엽이 이별의 시간을 상징한다면, 눈은 모든
K-Classic News 손영미 (시인 · 극작가 · 칼럼니스트) 한 사람이라는 우주 정현종의 시 「방문객」이 가르쳐준 사랑의 존재론과 환대의 미학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언어다. 우리는 사랑을 흔히 설렘과 열정으로 기억하지만, 사랑의 본질은 감정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다. 진정한 사랑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을 넘어, 한 존재가 걸어온 시간과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수용(受容)'의 행위다. 사랑은 설렘으로 시작될 수는 있어도, 결국 수용을 통해 완성된다. 인간은 혼자 존재할 수는 있지만, 혼자 완성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삶은 언제나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확장되고, 그 만남은 서로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관계란 타인을 이해하는 기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기꺼이 맞아들이는 주체적인 용기다. 이러한 사랑의 근원성을 가장 단정하고도 깊이 노래한 작품이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K-Classic News 글 | 손영미 | 극작가·시인·칼럼니스트 | 신의 가장 다정한 선물, 내 영혼의 가장 아름다운 울림 노래가 우리에게 주는 열 가지 행복 사람은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운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노래한다. 울음이 생존을 위한 첫 언어라면, 노래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다. 기쁨이 벅찰 때도, 슬픔이 깊어질 때도 사람은 결국 노래를 찾는다. 말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목소리는 가 닿고, 언어가 멈춘 자리에서 비로소 선율은 마음을 대신한다. 오랜만에 벨라비타 원우들과 한 무대에 선다. 개원 발기부터 함께 걸어온 시간이 어느덧 열한 기수를 이루었다. 운영이사로 무대에 선다는 것은 늘 설렘과 부담을 함께 안겨준다. 하지만 막이 오르기 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악보가 아니라 사람이다. 서로 다른 계절을 건너온 삶들이 한 곡의 노래 앞에서 같은 숨을 맞추는 순간, 무대는 공연을 넘어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노래는 잘 부르는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목소리를 빌려 세상과 악수하는 일이며, 서로 다른 삶이 하나의 울림으로 이어지는 기적이다. 그래서 무대는 경쟁의 자리가 아니라 서로를 응원하는 가장 따뜻
K-Classic News 손영미 시인·작가·칼럼니스트) - (사)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제47회 서울예술가곡제 개최 - 성악가 106인이 함께 그려내는 한국 가곡의 과거·현재·미래 (사)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이사장 정원이경숙)가 한국 가곡 탄생 106주년을 기념해 올해 6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제47회 서울예술가곡제’를 개최한다. 이번 가곡제는 ‘한국가곡 106년! 시대를 건너다! 노래를 잇는 우리의 숨결’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1920년 홍난파의 「봉선화」로 시작된 한국 가곡의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고, 세계를 향해 나아갈 미래를 하나의 음악 서사로 엮어내는 특별한 프로젝트다. 공연에는 원로·중견·신진 성악가 106인이 대거 참여한다. 매월 다른 주제 아래 한국 가곡의 정서와 예술성을 다채롭게 펼쳐 보이며, 회차별 전문 팀장이 무대의 예술적 완성도를 높인다. 지난 6월 30일 개최된 제1회 공연(팀장 손영미)은 가곡 애호가와 문화예술계 귀빈들의 찬사 속에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특히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의 손자 홍익표 교수가 참석해 뜻깊은 의미를 더했다. 축제는 오는 11월까지 매월 1회씩 이어진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기억을 담은 2회(7월),
K-Classic News 글 | 손영미 시인 · 극작가 · 칼럼니스트 매년 초여름,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궁전 정원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외 콘서트홀로 변모한다. 황금빛으로 물든 바로크 양식의 궁전과 싱그러운 기하학적 정원이 어우러진 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빈 필하모닉 여름밤 콘서트(Sommernachtskonzert)는 클래식 음악이 지닌 고유의 우아함이 대중의 열기와 만나는 가장 이상적인 축제의 장이다. 올해의 프로그램은 오페라와 발레, 정통 관현악과 뮤지컬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음악이 지닌 순수 예술성과 대중적 흡입력을 동시에 품어 안았다. 그리고 이 야심 찬 무대의 중심에는 젊은 거장 로렌조 비오티(Lorenzo Viotti)의 감각적인 지휘와, 세계적인 바리톤 브린 터펠(Sir Bryn Terfel)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젊은 지휘자의 다이내믹과 거장의 드라마틱한 만남 로렌조 비오티는 오늘날 클래식계에서 가장 뜨겁게 주목받는 차세대 지휘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빈 필하모닉 특유의 깊고 우아한 전통적 음색(Wiener Klangstil) 위에, 젊고 세련된 리듬감과 현대적인 감각을 더하며 오케스트라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유
K-Classic News •글 | 손영미 시인 극작가, 칼럼니스트 2026년은 한국 문학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1926년생 문학인들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이번에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는 지난 6월 18일 오후 3시 30분,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대산홀에서 소설가 박경리, 극작가 김자림과 박현숙, 시인 김종길과 박인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다섯 문학인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랑을 통과하며 지켜낸 시대의 상처와 인간의 존엄을, 문학을 통해 다시금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지난 100년을 돌아보며 또 다른 시대적 전환점 앞에 서 있다. AI가 문장을 쓰고, 알고리즘이 취향을 결정하며, SNS가 감정을 소비하는 시대. 과거의 문학이 전쟁과 가난, 분단의 상처를 견디게 했다면, 앞으로의 문학은 소음과 속도, 과잉된 자기 노출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내야 한다. 한없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쉼 없이 배설되는 현대인의 과잉된 언어들과 달리, 시는 침묵의 뼈를 발라내어 가장 정직한 진액만을 남기는 작업이다. 뱉어낸 단어보다 차마 뱉지 못해 행간에 숨겨둔 여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