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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dos Han 칼럼] 개미의 공리주의, 다수의 행복을 향한 본능에서 인간 사회가 배워야 할 것

숫자 홍수 속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

K-Classic News  Erdos Han 작가|

 

 

 

인간은 오랫동안 더 나은 사회를 꿈꾸어 왔다. 철학은 정의를 말했고, 정치학은 제도를 만들었으며, 종교와 윤리는 인간에게 선과 악을 가르쳤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 인간의 마음은 오히려 메말라가고 있다. 과학기술은 놀랍도록 진보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는 약해지고, 경제는 거대해졌지만 행복은 그만큼 커지지 않았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확대되었지만 공동체에 대한 책임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작은 생명체인 개미를 바라보면 뜻밖의 질문을 만나게 된다

 

‘개미에게는 사회를 유지하는 어떤 공리적 질서가 있는 것은 아닐까.’개미는 철학책을 읽지 않는다. 공리주의라는 개념도 모른다. 제러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을 알 리도 없다. 그런데도 개미 사회는 집단 전체의 생존과 번영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한 마리의 개미가 자기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찾고 운반하고 집을 지키며 어린 개체를 돌보는 과정에서 집단 전체의 이익이 우선된다.

 

물론 이것을 인간의 철학적 의미에서 그대로 ‘공리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다. 개미의 행동은 철학적 판단이나 도덕적 선택이라기보다 진화와 본능, 그리고 집단적 생존에 의해 형성된 행동이다. 그러나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 인간은 행복을 말하면서도 행복을 독점하려 하고, 공동체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한다. 반면 개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무너지면 자기 자신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개미 한 마리가 먹이를 발견하면 그 정보는 집단으로 전달된다. 여러 개미가 협력하여 먹이를 운반하고, 위험이 닥치면 일부는 방어에 나선다. 누군가는 일하고, 누군가는 새끼를 돌보고, 누군가는 둥지를 지키며, 누군가는 외부의 위험을 감시한다. 개체마다 역할은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다. 집단의 생존이다. 여기에는 인간 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중요한 원리가 있다.

 

‘나의 행복이 공동체의 불행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현대사회는 개인의 성공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좋은 직장, 높은 소득, 더 큰 집, 더 많은 소비, 더 높은 사회적 지위가 행복의 기준처럼 제시된다.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고,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관념이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얻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소외되고 좌절한다면 그 사회 전체는 과연 행복한 사회인가.

 

공리주의는 기본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방향을 제시한다. 물론 인간 사회에서 이 원리를 적용하는 데에는 매우 복잡한 문제가 따른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권리를 희생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현대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단순히 다수결만을 최고의 원리로 삼지 않는다. 소수자의 권리, 개인의 존엄, 자유와 평등 역시 중요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공리주의적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선택이 나에게만 좋은가, 아니면 더 많은 사람에게 좋은가.’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 개미의 세계에는 인간처럼 거대한 욕망의 시장이 없다. 개미는 명예를 위해 경쟁하지 않는다. 다른 개미보다 더 큰 집을 갖기 위해 싸우지도 않는다.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일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작은 사회는 상당히 효율적인 협력체계를 유지한다.

 

개미의 위대한 점은 개체의 능력이 아니라 연결의 능력에 있다

 

한 마리의 개미는 작고 약하다. 그러나 수많은 개미가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움직일 때 전혀 다른 힘이 생긴다. 개미집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기능한다. 각각의 개미가 전체를 알지 못하면서도 전체의 목적에 기여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의 인공지능과도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한다. 개미 한 마리가 거대한 집단의 전체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각은 단순한 규칙과 환경의 신호에 반응한다. 그런데 수많은 개체의 상호작용 속에서 복잡한 질서가 나타난다. 이것을 우리는 ‘집단지성’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대통령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민, 노동자, 기업인, 과학자, 예술가, 공무원, 교사, 의료인, 농민, 기술자들의 행동이 서로 연결되어 사회를 만든다. 사회의 건강은 어느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문제는 인간에게는 개미보다 훨씬 복잡한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미래를 상상하고, 소유를 축적하며, 타인과 비교하고,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추구한다. 이것은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공동체를 파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욕망이 적절한 방향으로 흐르면 창조가 된다. 그러나 욕망이 공동체의 책임을 잊으면 탐욕이 된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책임의 균형이다. 개미에게는 감정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처럼 개인의 욕망을 중심으로 사회를 해석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랑과 연민, 공감과 죄책감, 정의와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이 인간만의 능력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효율이 인간의 존엄보다 앞서고, 숫자가 사람보다 중요해지고, 성과가 관계보다 중요해진다. 노인은 사회적 부담으로, 장애인은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은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으로만 평가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개미보다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너무 많은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계산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고, 경쟁할 수 있으며, 권력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배려하고 나눌 수도 있고,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도 있다. 인간에게는 개미에게 없는 철학과 예술, 문학과 음악이 있다.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처럼 느끼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능력도 있다.

 

따라서 인간이 개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개미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개미의 협력에 인간의 이성을 더하는 것이다. 개미는 본능적으로 집단을 위해 움직인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공동체의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 개미는 집단의 생존을 위해 행동하지만 인간은 거기에 존엄과 자유와 권리를 더해야 한다. 개미의 본능적 협력과 인간의 철학적 성찰이 만난다면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이 열린다.

 

AI가 효율을 계산한다면 인간은 그 효율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물어야

 

특히 인공지능 시대에는 이 문제가 더욱 중요해진다.AI는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데이터를 처리하고, 반복적인 산업과 행정의 많은 영역을 수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겨지는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공감하고 판단하는 능력, 그리고 무엇이 옳은지를 묻는 능력일 것이다. AI가 효율을 계산한다면 인간은 그 효율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AI가 가장 빠른 길을 찾아낸다면 인간은 그 길이 인간다운 길인지 판단해야 한다. 기술이 부를 만들어낸다면 인간은 그 부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개미의 세계가 하나의 거울이 된다. 개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버리고 혼자 거대한 성공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 개미에게는 공동체의 생존이 곧 자신의 생존이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결국 연결된 존재다.

 

한 나라의 경제가 무너지고, 이웃의 삶이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되고, 사회적 신뢰가 사라지면 그 피해는 언젠가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담장 밖의 불행이 결국 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행복은 개인의 행복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개인의 행복을 지키는 토대가 된다. 우리는 이제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시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잘살 수 있는가’를 묻는 사회로 가야 한다.그렇다고 개인을 집단에 희생시키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정한 공동체는 개인의 존엄을 지키면서도 서로의 삶을 연결하는 공동체다. 다수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인간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개미에게서 배울 것은 집단을 위해 개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할이 전체의 생존을 위해 연결되는 구조다.

개미집에는 지도자가 모든 것을 지시하는 모습도 없다. 작은 신호들이 축적되고, 수많은 개체가 반응하며, 전체적으로 질서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중앙집중적인 명령만으로 움직이는 사회와는 다른 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대 민주사회도 이런 방향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 국민은 명령을 기다리는 개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 있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시민이어야 한다. 정부는 국민을 통제하는 기관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시스템을 설계하는 기관이어야 한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되 사회적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시민은 권리를 요구하는 만큼 타인의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적 공리주의의 새로운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감성이 있어야 한다.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숫자를 보고 산다. 주가, 집값, 성장률, 매출, 생산성, 순위, 조회수, 구독자 수가 사람의 가치를 대신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숫자로만 측정할 수 없다.

 

어머니가 자녀의 손을 잡아주는 순간, 외로운 노인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주는 순간, 병든 사람의 곁을 지켜주는 순간,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순간에는 경제지표로 측정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그것이 감성이다. 그리고 감성은 이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숙한 이성은 감성을 필요로 한다. 이성이 ‘무엇이 가능한가’를 묻는다면 감성은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다. 이성이 길을 계산한다면 감성은 그 길을 함께 걸을 사람을 바라본다. 이성이 사회의 구조를 만든다면 감성은 그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살핀다. 개미의 공리주의가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여기에 있다. 혼자 살아남는 능력보다 함께 살아남는 능력이 더 위대한 생존의 지혜라는 것.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문명을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철학을 만들었다

 

개미는 작다. 그러나 개미집은 크다. 한 마리의 힘은 미약하지만 수많은 개체가 연결되면 거대한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인간도 작다. 한 사람의 삶 역시 우주의 시간 속에서는 한순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문명을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철학을 만들었다. 오늘의 인간이 내일의 인간에게 지식을 전하고,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전하면서 인류는 살아남았다. 결국 문명의 진보란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미는 본능으로 그것을 실천한다. 인간은 이제 이성과 감성으로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개미에게 철학은 없지만 공동체가 있고, 인간에게 공동체가 있지만 철학을 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작은 개미집 앞에 서서 인간 사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왜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인류의 진정한 진보는 얼마나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생명을 함께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개미의 세계에는 인간이 부러워할 만한 거대한 건축도, 화려한 문명도, 철학책도 없다. 그러나 그 작은 사회에는 협력이라는 오래된 지혜가 살아 있다. 이제 인간은 그 지혜에 이성을 더해야 한다. 본능적 협력 위에 자유를 세우고, 집단의 생존 위에 개인의 존엄을 세우며, 효율 위에 공감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감성은 더욱 깊어져야 한다.


AI가 계산하는 시대에 인간까지 계산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계가 효율을 담당할수록 인간은 행복을 생각해야 한다.
기계가 생산을 담당할수록 인간은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기계가 정보를 연결할수록 인간은 마음을 연결해야 한다.
그것이 개미에게서 배우는 인간의 공리주의다.

 

한 마리의 행복이 아니라 모두의 생존을 생각하고, 모두의 생존을 넘어 모두의 존엄과 행복을 생각하는 것. 개미는 본능으로 집단을 지킨다. 인간은 이제 의식적으로 서로를 지켜야 한다. 어쩌면 인류가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길은 더 많은 것을 갖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가진 인간이 이제 배워야 할 것은 함께 행복해지는 기술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수업은 놀랍게도 우리의 발밑, 작은 개미집에서 시작될 수 있다.

 

Artist ERDOS HAN KYUNG 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