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노유경 평론가 기자 |
[노유경 리뷰]
한국어 원문과 독일어 번역문 병기
Koreanischer Originaltext mit deutscher Übersetzung
일시: 2026년 5월 8일 금요일
장소: 주독 한국문화원, 베를린 / 주독 대한민국 대사관저, 베를린 그루네발트
행사: 독·한협회 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 e.V. 연방 회원총회 및 주독 대한민국 대사관저 리셉션
주요 내용: 독·한협회 창립 60주년 준비, 지역협회 활동 보고, 임원진 구성, 한·독 시민사회 교류와 문화외교의 현재

베를린에서 마주한 60년 — 독·한협회 연방 회원총회와 그루네발트의 저녁
부제: 2026년 5월 8일, 주독 한국문화원과 주독 대한민국 대사관저에서 돌아본 한·독 시민외교의 시간
2026년 5월 8일, 베를린은 두 개의 의미 있는 시간을 품고 있었다. 라이프치거 광장의 주독 한국문화원에서는 독·한협회, 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 e.V.(DKG)의 연방 회원총회(Bundesmitgliederversammlung)가 열렸고, 그 날 저녁에는 그루네발트의 주독 대한민국 대사관저에서 임상범 대사 내외의 초청으로 리셉션이 이어졌다. 낮에는 시민사회가 쌓아 온 한·독 교류의 60년을 돌아보았고, 저녁에는 대한민국 외교 공간에서 그 관계를 따뜻하게 확인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마침 이날은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억하는 5월 8일, 독일어로 Tag der Befreiung (해방의 날)이라 불리는 날이기도 하다. 동시에 한국에서는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는 어버이날이다. 독일의 역사적 기억과 한국의 가족적·윤리적 기억이 같은 날짜 위에 겹쳐진 날, 우리는 독일과 한국 사이의 지난 6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하는 자리에 함께했다. 시민의 자발적 결사와 국가의 공식 외교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있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분단을 살아 낸 두 사회의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60년의 역사를 돌아본 것은 단순한 일정상의 우연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1966–2026, 시민사회가 쌓아 올린 60년
독·한협회는 1966년에 창립되었다. 이 연도는 결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시점이다. 1963년 한국과 서독 사이에 광부 파독 협정이 체결되었고, 1966년에는 간호사 파독이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독한협회는 한국인들이 노동을 매개로 독일 사회에 본격적으로 들어오던 바로 그 시간에, 양국 시민 사이의 비공식적 만남의 장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로 출발했다. 국가 간 협정이 만든 인적 흐름이 어떻게 일상적 신뢰의 관계로 번역될 수 있는가?
이 물음이 협회의 출발점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60년. 오늘 회원 총회에서는 활동 보고와 재정 보고, 정관 개정, 지역협회 활동,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 "Building Bridges", 그리고 60주년 기념사업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회의 자료를 보며 다시 느낀 것은, 독·한협회의 활동이 단순한 친선 모임의 차원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민간외교 (zivilgesellschaftliche Diplomatie)의 현장이라는 점이었다.
협회를 이끄는 사람들
이번 총회에서는 Rolf Mafael 회장님의 연임과 함께 새로운 임원진 구성이 이루어졌다. Mafael 회장님은 전 주한 독일대사로서 한국과 독일 양쪽을 깊이 이해하는 분이며, 독·한협회를 베를린 중심의 단체가 아니라 독일 전역의 지역협회들과 함께 움직이는 연방 차원의 협회로 이끌고자 해 오셨다. 정관 정비, 회원 관리의 디지털화, 재정 구조 정비, 60주년 준비 — 이 모든 일들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협회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들이다. 그 조용하고도 실질적인 추진력이 인상 깊었다. 새로 구성된 임원진의 면면을 통해서도 협회의 성격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부회장 Prof. Rolf Hempelmann 교수님과 Juliana Gyonga Baron 부회장님, 사무총장 Barbara Sternagel 변호사님, 재무담당 Thomas Konhäuser 이사님, 서기 Doris Hertrampf 전 대사님, 그리고 한·독 기관 간 관계를 담당하시는 Ok-Hi Yun 이사님. 외교, 법조, 자연과학, 산업계, 시민사회, 한국학, 한인 사회와의 가교 역할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한·독 관계를 위해 오랫동안 일해 온 분들이다. 60년이라는 시간이 한 두 사람의 성과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누적된 헌신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특히 NRW 지역협회에서는 Reiner Schöler 회장님과 Wolfram van Stephold 사무총장님이 참여하셨다.
Reiner Schöler 회장님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에서 열리는 여러 중요한 한·독 관련 행사에 독·한협회를 대표해 참석하고, 따뜻하고 품격 있는 인사말로 한·독 우정의 의미를 전해 오신 분이다. Wolfram van Stephold 사무총장님은 협회의 재정 워킹그룹 AG Finanzen 위원으로서 이번 총회의 재정 보고와 협회의 실무적 안정성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계신다. 한 협회가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대 위의 행사만이 아니라, 회비 관리, 재정 정비, 회계 보고와 같은 보이지 않는 실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van Stephold 사무총장님의 역할은 협회의 지속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반이라 할 수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은 독일 안에서도 한국 관련 문화, 교육, 시민 교류가 활발하게 이어지는 지역의 하나이다. 앞으로도 이 지역에서 독한협회를 중심으로 한 한독 교류가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하게 된다.
연방의 지도
각 지역협회의 보고를 통해 독한협회의 활동이 독일 전역에서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활동들은 하나의 중앙 조직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사람들, 도시, 기관, 그리고 오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회의 자료에 제시된 각 지역협회의 활동은 그 자체로 한독 관계의 문화지리적 지도처럼 보였다. 자를란트의 Prof. Rolf Hempelmann 교수는 “Korea-Monat”와 앞으로 계획된 “Korea-Woche” 같은 행사들에 대해 보고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지역협회 회장인 Ju-Kyung Park 회장은 언어 탄뎀, 김치와 불고기 요리 강좌, 그리고 슈투트가르트 시립도서관의 한국 관련 활동들을 소개했다. 바이에른의 Frank Hollmann 회장은 St. Ottilien을 중심으로 한 활동과 이 장소가 한·독 기억문화에서 지니는 의미를 언급했다. 헤센/라인란트팔츠의 Bohrami Ahrens는 새로 설립된 지역협회의 활동에 대해 보고했으며, 그 안에는 영화 상영, 강연, 한국 관련 토론 행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베를린-브란덴부르크에서도 다양한 학술 및 문화 활동들이 소개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전 주평양 독일대사 Thomas Schäfer의 강연도 있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협회에서는 Reiner Schöler 회장이 쾰른에서 열린 김치 워크숍, 한국 예술가들의 전시, 그리고 재독한인총연합회와 쾰른의 해금 앙상블 K-YUL 등 여러 협력 파트너들과의 만남에 대해 보고했다. 이 대목은 필자에게 개인적으로도 특별히 의미 있게 다가왔다. K-YUL은 단순한 음악 앙상블이 아니라, 독일 사회 안에서 한국 전통음악이 어떻게 새롭게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장기적인 문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고들은 독한협회가 특정 도시나 특정 인물에만 의존하는 단체가 아니라, 독일 여러 지역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독 교류를 실천해 온 조직임을 보여 준다.
지역마다 활동의 형식은 달랐지만, 그 바탕에는 한국과 독일을 잇고자 하는 공통된 의지가 있었다. 한·독 관계는 베를린의 외교 공간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를란트의 행사, 바덴뷔르템베르크의 도서관과 식탁, 바이에른의 기억문화 공간, 헤센/라인란트팔츠의 새 지역협회, 베를린-브란덴부르크의 학술·문화 활동, 그리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지역 네트워크 속에서 다층적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연방형 구조는 transkulturelle Mikropraxis, 곧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초문화적 실천의 장이라 부를 만하다. 강연, 영화 상영, 언어 교환, 음식 문화 체험, 도서관 활동, 예술 전시, 전통음악 앙상블과의 협력은 각각 작은 활동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실천들이 지역을 가로질러 축적될 때, 한·독 관계는 추상적인 외교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시민사회의 경험으로 자리 잡는다. 이 점에서 독·한협회의 분산적 구조는 하나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지역이 각자의 역사와 조건 속에서 한국과 만나는 방식을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구조가 시민사회 차원에서 한·독 관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생동감 있게 성장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K-YUL과 독한협회 — 어느 작은 음악 공동체의 자리
필자에게 독·한협회는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음악학과 한국어 교육의 현장에서 필자는 한국 문화가 독일 사회 안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다시 실천되며, 새로운 의미를 얻어 가는지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고민해 왔다. 그 고민의 한 구체적 결실이 해금 앙상블 K-YUL이다. K-YUL은 한국 전통악기 해금을 중심으로 모인,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음악 공동체이다. 구성원의 대부분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특히 대학생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이 해금을 배우고 연주하며 한국 문화를 독일 사회 안에서 직접 실천하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K-YUL은 단순한 음악 앙상블을 넘어 한독 문화교류의 매우 특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한국 문화를 단순히 '관람'하는 데 머물지 않고, 직접 자신의 손과 귀와 호흡으로 체험한다. 독일의 젊은 학생들이 해금의 농현과 시김새, 그리고 한국 음악 특유의 호흡을 익혀 무대에 서는 일은, 한국 문화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소비되는 것을 넘어 함께 연주되고 함께 살아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K-YUL은 이른바 Aneignung(전유)을 넘어선 Mit-Spielen(함께-연주하기)의 실천이다. 해금이 외국인 연주자들의 손에서 다시 울릴 때, 한국 전통음악의 음향적 정체성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청자와 연주자를 통해 그 의미가 확장된다.
이는 K-Pop이나 K-드라마와 같은 산업적 차원의 한류와는 다른 결의 문화 교류이며, 한국학(Koreastudien)의 시야 안에서도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영역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새로움 때문에, 이 활동은 기존의 지원 제도 안에서 쉽게 설명되거나 분류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한국 전통문화 지원의 문법은 보통 "한국인 예술가"를 전제하고 있고, 독일의 문화 지원은 일반적으로 "독일 예술가"를 전제한다. 그 사이에서 K-YUL과 같은 공동체는 종종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자기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했다. 그동안 여러 기관과 단체에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외국인 학생들이 한국 전통악기를 배우고 연주하며 한국 문화를 알리는 이 활동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런 현실 속에서 독·한협회는 K-YUL의 활동을 진심으로 지켜봐 주고, 이해해 주고, 응원해 준 거의 유일한 단체였다. 특히 협회가 K-YUL을 한독 문화교류의 의미 있는 사례로 인정해 주고, Schirmherrschaft(후견)를 통해 함께해 준 일은 큰 힘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적 후원이 아니라, 독일 사회 안에서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외국인 학생들의 노력을 귀하게 보아 준 따뜻한 지지였다. 그래서 오늘 독한협회 60주년을 준비하는 이 자리에 함께하면서, 이 단체가 지난 60년 동안 해 온 일뿐 아니라 앞으로 이어 갈 일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느꼈다.

그루네발트, 또는 역사가 머무는 자리
회의가 끝난 뒤에는 임상범 주독 대한민국 대사님의 초청으로 그루네발트 멘첼슈트라세(Menzelstraße)의 대사관저에서 리셉션이 이어졌다. 그루네발트는 19세기 말 빌헬름 시대 베를린의 부유한 시민계급이 도시의 소란에서 벗어나 정원과 호수 사이에 빌라를 짓던 지역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역사는 결코 평화롭지만은 않다. 인근 그루네발트 역의 17번 선로(Gleis 17)는 나치 시기 베를린 유대인들이 동유럽의 절멸수용소로 이송되던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그루네발트라는 지명 자체가 독일 현대사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새기고 있는 장소이다. 대사관저로 사용되고 있는 멘첼슈트라세의 건물은 과거 베를린 상원의 영빈관(Gästehaus des Berliner Senats)으로 쓰였으며, 빌리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이던 시기에 베를린 주가 매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1964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장소로도 기억되고 있다.
브란트는 1969년 이후 Wandel durch Annäherung(접근을 통한 변화)이라는 정신으로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하며 냉전기 유럽의 정치 지형을 새롭게 그렸다. 이 정책의 정신은 훗날 한국의 햇볕정책에도 중요한 영감으로 작용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브란트를 자신의 정치적 스승으로 언급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집을 한국 대사관저가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부동산의 이력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냉전기 분단 도시의 정치적 상상력이 깃든 공간이, 또 다른 분단 사회로부터 온 외교의 거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이 장면은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가 말한 ‘기억의 장소’를 떠올리게 했다. 공간은 침묵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오간 사람들, 나뉘었던 세계, 다시 이어지려 했던 노력들은 장소의 결 안에 남아 다음 세대에게 조용히 전해진다.

가야금, 두 문화의 청각적 교차점
무엇보다 오늘 마음에 깊이 남은 것은 임상범 대사님과 사모님의 따뜻하고 품격 있는 환대였다. 공식적인 자리였지만 분위기는 딱딱하지 않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심하게 맞아 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외교란 국가와 제도 사이의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배려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해 주는 자리였다. 특히 대사님께서 독한협회를 위해 준비하신 가야금 연주(박현정)는 오래 기억에 남을 자리였다.
이날 연주된 악기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12현의 전통 가야금이 아니라 20세기 후반에 개량된 25현 가야금이었다. 독일에서 이 악기를 직접 들어 볼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25현 가야금은 음역이 크게 확장되어 서양 평균율의 화성 어법과 현대 창작곡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악기로, 음색의 결이나 양손의 운지법, 풍부한 울림 때문에 서양 청자들에게는 종종 하프(Harfe)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야금은 하프와 달리 안족(雁足)을 옮겨 음정을 조율하고, 왼손으로 줄을 누르고 흔들어 농현(弄絃)과 시김새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음향 세계에 속한다.
하프가 화음의 수직적 울림을 향한다면, 가야금은 한 음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과 호흡, 곧 한 음의 깊이를 향한다. 19세기 빌라의 목조 천장 아래에서 이 25현 가야금의 울림이 퍼지는 순간, 그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서양 실내악의 울림에 익숙한 살롱 안에서, 가야금의 농현과 시김새가 만들어 내는 미세한 떨림은 낯설면서도 자연스럽게 공간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World Music적 절충이 아니라, 각자의 음향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일, 아도르노 학자의 Versöhnung 개념 (화해) , 두 문화가 서로를 동일화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시간을 함께 듣는 일이었다. 한국 음악의 오래된 기억을 품으며 현대적 표현력을 지닌 울림은 오늘의 한독 관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조용히 들려주었다
60년, 그리고 그 다음
한·독 관계는 외교 협정이나 정상회담의 사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관을 정비하고, 회비 명부를 디지털화하고, 청소년 교환 프로그램을 위해 후원금을 신청하고, 지역 도서관에 한국 코너를 새로 마련하고, 어느 외국인 학생이 처음 잡아 본 해금의 활을 격려해 주고, 어느 저녁 가야금 한 곡을 준비하는 — 보이지 않는 노동의 누적 위에 세워진다. 60년이라는 숫자는 결코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다. 그것은 매년 새로 갱신되어야 했던 어떤 결심의 합계이다.
베를린은 언제나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이지만, 오늘은 그 역사 속에서 한국과 독일의 관계가 얼마나 조용하고도 단단하게 이어져 왔는지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60년은 결론이 아니라 또 하나의 출발점이다. 이름이 기록될 때 역사는 비로소 얼굴을 갖는다. 그리고 그 얼굴들이 모여, 독일과 한국 사이의 다음 60년을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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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노유경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음악학 박사, 쾰른대학교 출강
해금앙상블 K-YUL 음악감독, 단장
ynhovon1@uni-koeln.de
Instagram: @hangulmanse · @kyul_germany

Begegnung mit sechzig Jahren in Berlin
Bundesmitgliederversammlung der Deutsch-Koreanischen Gesellschaft und ein Abend in Grunewald
Untertitel: Am 8. Mai 2026 — Eine Rückschau auf die zivilgesellschaftliche Diplomatie zwischen
Deutschland und Korea im Koreanischen Kulturzentrum und in der Residenz des Botschafters der Republik Korea
Am 8. Mai 2026 trug Berlin zwei bedeutungsvolle Zeiten in sich. Im Koreanischen Kulturzentrum am Leipziger Platz fand die Bundesmitgliederversammlung der Deutsch-Koreanischen Gesellschaft e.V. (DKG) statt, und am Abend folgte auf Einladung von Botschafter Im Sang-beom und seiner Gattin ein Empfang in der Residenz des Botschafters der Republik Korea in Grunewald. Tagsüber wurde auf sechzig Jahre zivilgesellschaftlich gewachsenen Austauschs zwischen Korea und Deutschland zurückgeblickt; abends bot der diplomatische Raum der Republik Korea Gelegenheit, diese Beziehung in herzlicher Atmosphäre zu vergegenwärtigen. Es traf sich, dass dieser Tag in Europa als der 8. Mai an das Ende des Zweiten Weltkriegs erinnert — der „Tag der Befreiung". In Korea wiederum begeht man an diesem Datum den Elterntag, an dem die Liebe und Fürsorge von Vater und Mutter geehrt werden. An einem Tag, an dem sich die historische Erinnerung Deutschlands und die familiär-ethische Erinnerung Koreas auf demselben Datum überlagerten, kamen wir zusammen, um auf die vergangenen sechzig Jahre deutsch-koreanischer Beziehungen zurückzuschauen und über deren Zukunft nachzudenken. Dass freiwillige bürgerschaftliche Vereinigung und offizielle staatliche Diplomatie nicht voneinander getrennt verlaufen, sondern sich innerhalb derselben Zeit gegenseitig stützen — und dass Bürgerinnen und Bürger zweier Gesellschaften, die je auf ihre Weise die Erfahrung der Teilung durchlebt haben, an einem Tisch auf sechzig Jahre gemeinsamer Geschichte zurückblickten — geht über einen bloßen terminlichen Zufall hinaus.
1966–2026: Sechzig Jahre, die von der Zivilgesellschaft aufgebaut wurden
Die 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 wurde 1966 gegründet. Dieses Datum lässt sich nicht achtlos übergehen. 1963 war zwischen Korea und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das Abkommen zur Entsendung koreanischer Bergleute geschlossen worden, und 1966 trat die Anwerbung koreanischer Krankenschwestern in ihre eigentliche Phase ein. Mit anderen Worten: Die DKG entstand genau zu der Zeit, als Koreanerinnen und Koreaner über die Arbeit in die deutsche Gesellschaft einzutreten begannen — als Versuch, den informellen Begegnungsraum zwischen den Bürgerinnen und Bürgern beider Länder zu institutionalisieren. Wie können die durch zwischenstaatliche Abkommen ausgelösten Menschenströme in alltägliche Beziehungen des Vertrauens übersetzt werden? Diese Frage stand am Anfang der Gesellschaft. Sechzig Jahre später. Auf der heutigen Bundesmitgliederversammlung wurde über Tätigkeits- und Finanzberichte, Satzungsänderungen, die Aktivitäten der Regionalverbände, das Jugendaustauschprogramm „Building Bridges" sowie über die Vorbereitungen zum sechzigjährigen Jubiläum beraten. Beim Durchsehen der Unterlagen wurde mir erneut bewusst, dass die Tätigkeit der DKG keineswegs auf der Ebene eines bloßen Freundschaftsvereins angesiedelt ist, sondern eine sehr konkrete und dauerhafte zivilgesellschaftliche Diplomatie betreibt.
Die Menschen, die die Gesellschaft tragen
Auf dieser Mitgliederversammlung wurde Herr Rolf Mafael in seinem Amt als Vorsitzender bestätigt und ein neuer Vorstand konstituiert. Herr Mafael, der frühere deutsche Botschafter in der Republik Korea, kennt beide Länder zutiefst und führt die DKG mit dem Anspruch, sie nicht als berlinzentrierten Verein, sondern als eine bundesweit, mit den Regionalverbänden gemeinsam wirkende föderale Gesellschaft zu gestalten. Die Überarbeitung der Satzung, die Digitalisierung der Mitgliederverwaltung, die Konsolidierung der Finanzstruktur, die Vorbereitung des sechzigsten Jubiläums — all dies sind Aufgaben, die kaum ins Auge fallen, aber für die Zukunft der Gesellschaft unentbehrlich sind. Diese stille und zugleich substantielle Schaffenskraft hinterließ einen tiefen Eindruck. Auch die Zusammensetzung des neuen Vorstands lässt das Profil der Gesellschaft erkennen: die stellvertretenden Vorsitzenden Prof. Rolf Hempelmann und Frau Juliana Gyonga Baron, die Generalsekretärin Rechtsanwältin Barbara Sternagel, der Schatzmeister Thomas Konhäuser, die Schriftführerin und ehemalige Botschafterin Doris Hertrampf und Frau Ok-Hi Yun, die für die institutionellen Beziehungen zwischen Korea und Deutschland zuständig ist. Diplomatie, Recht, Naturwissenschaft, Industrie, Zivilgesellschaft, Koreanistik, Vermittlung zur koreanischen Gemeinschaft in Deutschland — eine jede und ein jeder dieser Persönlichkeiten hat an ihrem oder seinem Ort eine tiefe Verbindung zu Korea geknüpft und über lange Zeit für die deutsch-koreanischen Beziehungen gewirkt. Sechzig Jahre, so wurde mir erneut bewusst, sind nicht das Werk einer oder zweier Personen, sondern ruhen auf der angesammelten Hingabe vieler.
Aus dem Regionalverband Nordrhein-Westfalen waren der Vorsitzende Reiner Schöler und Generalsekretär Wolfram van Stephold anwesend. Herr Schöler vertritt die DKG bei zahlreichen wichtigen koreanisch-deutschen Veranstaltungen in NRW und trägt durch seine warmherzigen und würdevollen Grußworte die Bedeutung der deutsch-koreanischen Freundschaft weiter. Herr van Stephold ist Mitglied der AG Finanzen und hat im Finanzbericht dieser Versammlung sowie in der operativen Stabilität der Gesellschaft eine wichtige Funktion inne. Damit ein Verein langfristig Bestand hat, bedarf es nicht nur der Bühne der Veranstaltungen, sondern auch der oft unsichtbaren Praxis: Beitragsverwaltung, Finanzordnung, Rechnungslegung. In dieser Hinsicht stellt die Arbeit von Herrn van Stephold ein unverzichtbares Fundament für die Nachhaltigkeit der Gesellschaft dar. Nordrhein-Westfalen ist eine der Regionen in Deutschland, in denen kulturelle, bildungsbezogene und zivilgesellschaftliche Austauschaktivitäten mit Bezug zu Korea besonders lebendig stattfinden. Es ist zu erhoffen, dass der von der DKG getragene deutsch-koreanische Austausch in dieser Region weiter an Tiefe gewinnt.
Die Landkarte des Bundes
Aus den Berichten der einzelnen Regionalverbände wurde sichtbar, in wie vielfältigen Weisen die Tätigkeit der DKG in ganz Deutschland fortgesetzt wird. Diese Aktivitäten entstehen nicht einseitig aus einer zentralen Organisation, sondern leben durch die Menschen, Städte, Institutionen und langjährig gewachsenen Netzwerke in den jeweiligen Regionen. Die in den Unterlagen aufgeführten Tätigkeiten erschienen wie eine kulturgeographische Landkarte der deutsch-koreanischen Beziehungen. Prof. Rolf Hempelmann aus dem Saarland berichtete über den „Korea-Monat" und die geplante „Korea-Woche". Frau Ju-Kyung Park, Vorsitzende des Regionalverbands Baden-Württemberg, stellte Sprach-Tandems, Koch-Kurse zu Kimchi und Bulgogi sowie die Korea-bezogenen Aktivitäten der Stadtbibliothek Stuttgart vor. Frank Hollmann aus Bayern sprach über die Aktivitäten in St. Ottilien und über die Bedeutung dieses Ortes für die deutsch-koreanische Erinnerungskultur. Bohrami Ahrens aus Hessen/Rheinland-Pfalz berichtete über die Arbeit des neu gegründeten Regionalverbands, zu der Filmvorführungen, Vorträge und Diskussionsveranstaltungen zu Korea gehören. Aus Berlin-Brandenburg wurden vielfältige wissenschaftliche und kulturelle Aktivitäten vorgestellt, darunter ein Vortrag des ehemaligen Botschafters in Pjöngjang, Thomas Schäfer. Vom Regionalverband Nordrhein-Westfalen berichtete Reiner Schöler unter anderem über einen Kimchi-Workshop in Köln, Ausstellungen koreanischer Künstlerinnen und Künstler sowie über Begegnungen mit verschiedenen Kooperationspartnern, darunter dem Bund der Koreaner in Deutschland und dem Kölner Haegeum-Ensemble K-YUL. Diese Stelle bewegte mich auch persönlich. K-YUL ist nicht einfach ein Musikensemble, sondern ein langfristiges Kulturprojekt, das erprobt, wie koreanische traditionelle Musik innerhalb der deutschen Gesellschaft neu Wurzeln schlagen kann.
Diese Berichte zeigen, dass die DKG kein an einzelne Städte oder Personen gebundener Verein ist, sondern eine Organisation, die in den verschiedensten Regionen Deutschlands auf je eigene Weise deutsch-koreanischen Austausch praktiziert. So unterschiedlich die Formen der Aktivitäten in den Regionen sind, ihnen allen liegt der gemeinsame Wille zugrunde, Korea und Deutschland miteinander zu verbinden. Die deutsch-koreanische Beziehung wird nicht allein im diplomatischen Raum Berlins gestaltet, sondern bildet sich vielschichtig heraus: in den Veranstaltungen des Saarlandes, an den Bibliothekstischen und Esstischen Baden-Württembergs, in den erinnerungskulturellen Räumen Bayerns, im neugegründeten Regionalverband Hessen/Rheinland-Pfalz, in den wissenschaftlich-kulturellen Aktivitäten Berlin-Brandenburgs und im regionalen Netzwerk Nordrhein-Westfalens. Aus kulturwissenschaftlicher Perspektive lässt sich diese föderale Struktur als ein Feld transkultureller Mikropraxis bezeichnen — als Ort transkultureller Praktiken, die auf alltäglicher, mikroskopischer Ebene wirken. Vorträge, Filmvorführungen, Sprachtandems, Erfahrungen kulinarischer Kultur, Bibliotheksarbeit, Kunstausstellungen und Kooperationen mit Ensembles traditioneller Musik mögen für sich genommen wie kleine Aktivitäten erscheinen. Doch gerade dann, wenn sich diese kleinen Praktiken über die Regionen hinweg akkumulieren, wird die deutsch-koreanische Beziehung nicht zu einer abstrakten diplomatischen Parole, sondern zu einer konkreten zivilgesellschaftlichen Erfahrung. In diesem Sinne folgt die dezentrale Struktur der DKG nicht der Logik, alles von einem Zentrum aus zu steuern, sondern lässt zu, dass verschiedene Regionen in ihrer je eigenen Geschichte und unter ihren je eigenen Bedingungen ihre Weise des Begegnens mit Korea finden. Eben diese Struktur lässt sichtbar werden, wie vielfältig und lebendig die deutsch-koreanischen Beziehungen auf zivilgesellschaftlicher Ebene gewachsen sind.
K-YUL und die DKG — der Ort einer kleinen musikalischen Gemeinschaft
Für die Verfasserin hat die DKG auch eine ganz persönliche Bedeutung. Im Feld der Musikwissenschaft und des Koreanisch-Unterrichts beobachte und reflektiere ich seit langer Zeit, wie koreanische Kultur in der deutschen Gesellschaft aufgenommen, weiter praktiziert und mit neuen Bedeutungen versehen wird. Eine konkrete Frucht dieser Reflexion ist das Haegeum-Ensemble K-YUL. K-YUL ist eine weltweit einzigartige musikalische Gemeinschaft, die sich um das traditionelle koreanische Streichinstrument Haegeum versammelt. Die Mitglieder sind überwiegend keine Koreanerinnen und Koreaner, sondern internationale, vor allem studierende Musikerinnen und Musiker. Dass sie das Haegeum erlernen, spielen und damit koreanische Kultur innerhalb der deutschen Gesellschaft unmittelbar praktizieren und vermitteln, macht K-YUL zu mehr als einem Musikensemble — zu einem sehr besonderen Beispiel für deutsch-koreanischen Kulturaustausch. Sie verharren nicht bei einem bloßen „Betrachten" koreanischer Kultur, sondern erfahren sie unmittelbar mit ihren Händen, Ohren und ihrem Atem. Dass junge Studierende in Deutschland Nonghyeon, Sigimsae und den eigentümlichen Atem koreanischer Musik erlernen und damit auf die Bühne treten, ist ein Augenblick, in dem koreanische Kultur nicht im Blick des Anderen konsumiert wird, sondern im Mitspielen gemeinsam zum Klingen kommt. K-YUL ist eine Praxis, die die Aneignung übersteigt und ein Mit-Spielen verwirklicht. Wenn das Haegeum in den Händen ausländischer Spielerinnen und Spieler wieder erklingt, wird die klangliche Identität koreanischer traditioneller Musik nicht geschwächt, sondern in ihrer Bedeutung durch neue Zuhörerinnen, Zuhörer und Spielerinnen erweitert. Dies ist ein Kulturaustausch von anderem Schlag als das industrielle Phänomen der Hallyu in Gestalt von K-Pop oder K-Drama — ein Bereich, der auch innerhalb der Koreanistik (Koreastudien) noch nicht hinreichend in den Blick genommen worden ist. Gerade aufgrund dieser Neuartigkeit lässt sich diese Tätigkeit jedoch nur schwer innerhalb der bestehenden Förderstrukturen verorten. Die Grammatik der Förderung koreanischer Traditionskultur setzt in der Regel „koreanische Künstlerinnen und Künstler" voraus; die deutsche Kulturförderung wiederum setzt im Allgemeinen „deutsche Künstlerinnen und Künstler" voraus. Zwischen diesen beiden Logiken musste eine Gemeinschaft wie K-YUL häufig ihren eigenen Platz erst selbst schaffen, ohne irgendwo zugehörig zu sein. In den vergangenen Jahren hat unser Ensemble mehrere Institutionen und Organisationen um Unterstützung gebeten; vielfach blieb jedoch unklar, wohin diese Tätigkeit — ausländische Studierende, die ein koreanisches Traditionsinstrument lernen, spielen und damit koreanische Kultur vermitteln — gehört und nach welchen Kriterien sie förderfähig sein könnte. Inmitten dieser Realität war die DKG nahezu die einzige Vereinigung, die die Tätigkeit von K-YUL aufrichtig wahrgenommen, verstanden und unterstützt hat. Dass die Gesellschaft K-YUL als ein bedeutsames Beispiel deutsch-koreanischen Kulturaustauschs anerkannt und durch eine Schirmherrschaft begleitet hat, war eine große Stütze. Es handelte sich nicht um eine formale Förderung, sondern um eine warmherzige Wertschätzung der Bemühungen ausländischer Studierender, die koreanische Kultur in Deutschland lieben. So wurde mir an diesem Tag, an dem die Vorbereitungen für das sechzigjährige Jubiläum der DKG eingeleitet wurden, die Bedeutung nicht nur dessen, was diese Gesellschaft in den vergangenen sechzig Jahren geleistet hat, sondern auch dessen, was sie in der Zukunft fortzuführen vermag, umso tiefer bewusst.
Grunewald — oder: ein Ort, an dem Geschichte verweilt
Nach Ende der Versammlung folgte auf Einladung von Botschafter Lim Sang-beom ein Empfang in der Residenz des Botschafters der Republik Korea in der Menzelstraße in Grunewald. Grunewald ist jenes Quartier, in dem das wohlhabende Bürgertum des wilhelminischen Berlin sich seit Ende des 19. Jahrhunderts dem Lärm der Stadt entzog und zwischen Gärten und Seen Villen errichten ließ. Doch die Geschichte dieses Ortes ist nicht nur friedlich. Das nahegelegene Gleis 17 am Bahnhof Grunewald war in der Zeit des Nationalsozialismus der Ausgangspunkt der Deportation Berliner Jüdinnen und Juden in die Vernichtungslager Osteuropas. Der Ortsname Grunewald trägt damit das Licht und die Dunkelheit der deutschen Zeitgeschichte zugleich in sich. Das Gebäude in der Menzelstraße, das heute als Residenz dient, wurde früher als Gästehaus des Berliner Senats genutzt und soll, so wird überliefert, in der Amtszeit Willy Brandts als Regierender Bürgermeister von Berlin durch das Land Berlin erworben worden sein. Es ist überdies als jener Ort in Erinnerung, an dem 1964 Martin Luther King Jr. bei seinem Besuch in Berlin Aufenthalt nahm. Brandt entwickelte ab 1969 im Geiste des „Wandels durch Annäherung" seine Ostpolitik und zeichnete damit die politische Topographie Europas im Kalten Krieg neu. Der Geist dieser Politik diente später der koreanischen Sonnenscheinpolitik als wichtige Inspiration. Es ist bekannt, dass der frühere koreanische Präsident Kim Dae-jung Willy Brandt als seinen politischen Lehrer bezeichnete.
Dass eben dieses Haus heute als Residenz der koreanischen Botschaft genutzt wird, trägt also mehr als nur eine immobiliengeschichtliche Bedeutung. Ein Raum, in dem die politische Vorstellungskraft einer geteilten Stadt im Kalten Krieg ihre Spuren hinterlassen hat, dient nun als Stützpunkt der Diplomatie einer anderen geteilten Gesellschaft — diese Szene rief mir Pierre Noras Begriff der lieux de mémoire in Erinnerung. Räume schweigen nicht. Die Menschen, die in ihnen ein- und ausgingen, die Welten, die in ihnen geteilt waren, und die Bemühungen, sie wieder zu verbinden, bleiben in der Textur des Ortes erhalten und werden den folgenden Generationen still weitergegeben.

Das Gayageum — ein akustischer Schnittpunkt zweier Kulturen
Was sich mir an diesem Abend am tiefsten ins Gedächtnis eingeschrieben hat, war vor allem die herzliche und würdevolle Gastfreundschaft des Botschafters und seiner Gattin. Trotz des offiziellen Anlasses war die Atmosphäre nicht steif; jeder und jede wurde mit Aufmerksamkeit empfangen. Es war ein Abend, der noch einmal vor Augen führte, dass Diplomatie zwar zwischen Staaten und Institutionen stattfindet, im Kern aber aus Vertrauen und Achtsamkeit zwischen Menschen erwächst. Besonders nachhaltig wird mir die Gayageum-Darbietung von Park Hyunjung in Erinnerung bleiben, die der Botschafter eigens für die DKG vorbereiten ließ. Das an diesem Abend gespielte Instrument war nicht das gewöhnlich vorgestellte zwölfsaitige traditionelle Gayageum, sondern das in der zweiten Hälfte des 20. Jahrhunderts entwickelte fünfundzwanzigsaitige Gayageum. In Deutschland besteht selten die Gelegenheit, dieses Instrument unmittelbar zu hören. Das 25-saitige Gayageum besitzt einen erheblich erweiterten Tonumfang und ist so konzipiert, dass es die harmonischen Idiome der westlichen Temperierung und das zeitgenössische Komponieren weit aufnehmen kann. Wegen der Beschaffenheit seiner Klangfarbe, der beidhändigen Spieltechnik und seiner reichen Resonanz wird es von westlichen Hörerinnen und Hörern bisweilen mit der Harfe verglichen. Anders als die Harfe jedoch wird das Gayageum durch das Verschieben der beweglichen Stege (Anjok) gestimmt, und die linke Hand erzeugt durch Drücken und Beugen der Saiten Nonghyeon und Sigimsae. Das Gayageum gehört damit einer wesensverschiedenen Klangwelt an. Wenn die Harfe nach der vertikalen Resonanz des Akkords strebt, so wendet sich das Gayageum dem feinen Zittern, dem Atem und der Tiefe innerhalb eines einzigen Tones zu.
In jenem Augenblick, in dem unter der hölzernen Decke der Villa aus dem 19. Jahrhundert der Klang dieses 25-saitigen Gayageum sich entfaltete, veränderte sich die Atmosphäre des Raumes. Im Salon, dessen Akustik mit westlicher Kammermusik vertraut ist, drangen die feinen Schwingungen, die Nonghyeon und Sigimsae hervorbringen, fremd und doch selbstverständlich in den Raum ein. Dies war kein bloßer Kompromiss im Sinne einer World Music, sondern ein Akt, in dem zwei Kulturen denselben Raum teilten, ohne ihre je eigene klangliche Identität aufzugeben — Versöhnung (Adorno): ein gemeinsames Hören in derselben Zeit, ohne dass die eine Kultur in der anderen aufgehen müsste. Der Klang, der die alten Erinnerungen koreanischer Musik in sich trägt und zugleich moderne Ausdruckskraft besitzt, ließ leise vernehmbar werden, in welch vielfältigen Weisen sich die deutsch-koreanischen Beziehungen heute fortschreiben.
Sechzig Jahre — und das Weitere
Die deutsch-koreanische Beziehung entsteht nicht allein aus diplomatischen Abkommen oder den Bildern von Gipfeltreffen. Sie ruht auf der Akkumulation jener unsichtbaren Arbeit: die Satzung zu überarbeiten, die Beitragsliste zu digitalisieren, Förderanträge für ein Jugendaustauschprogramm zu stellen, in einer Stadtbibliothek eine Korea-Ecke einzurichten, die Bemühungen einer Studentin zu ermutigen, die zum ersten Mal den Bogen des Haegeum in die Hand nimmt, oder an einem Abend ein Gayageum-Stück vorzubereiten. Die Zahl Sechzig ist nicht aus sich selbst heraus einleuchtend. Sie ist die Summe einer Entschlossenheit, die Jahr für Jahr erneuert werden musste. Berlin ist immer eine Stadt, die Geschichte in sich trägt; an diesem Tag jedoch konnte ich tief empfinden, wie still und doch beharrlich sich innerhalb dieser Geschichte die Beziehung zwischen Korea und Deutschland fortgeschrieben hat. Sechzig Jahre sind kein Schlusspunkt, sondern ein weiterer Ausgangspunkt. Erst wenn Namen aufgeschrieben werden, erhält die Geschichte ein Gesicht. Und es sind diese Gesichter, die zusammen die nächsten sechzig Jahre zwischen Deutschland und Korea gestalten we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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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Dr. phil. (Musikwissenschaft/ Koreanisch), Dozentin an der Universität zu Köln
Musikalische Leiterin und Vorsitzende des Haegeum-Ensembles K-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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