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유경 리뷰】 작곡가 황재인,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인문학적 렉처 콘서트 주인공

  • 등록 2026.02.08 06: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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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의 소리를 설명하고, 듣는 무대 〈해금의 앞면과 뒷면 Die Vorder- und die Rückseite der Haegeum〉

K-Classic News 노유경 평론가 기자 

 

 

 

【노유경 리뷰 한국어 독일어/ Deutsch】

작곡가 황재인,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인문학적 렉처 콘서트 주인공

해금의 소리를 설명하고, 듣는 무대

장소: 쾰른대학교 음악학과 음악강당
시간: 2026년 2월 6일 16시

 

2026년 2월 6일 금요일 오후 4시, 쾰른대학교 음악학과 음악 강당에서는 작곡가이자 해금 연주가 황재인의 렉처 콘서트 〈해금의 앞면과 뒷면 Die Vorder- und die Rückseite der Haegeum〉가 열렸다. 이 공연은 단순한 연주회가 아니라, 하나의 악기를 둘러싼 사유와 설명, 그리고 연주가 결합된 인문학적 렉처 콘서트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황재인은 한국에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데뷔했다는 평판으로 알려진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필자 역시 오래전부터 그의 연주와 작품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해 왔다. 시중에 공개된 음원과 영상, 특히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는 다양한 연주 기록들은 그가 해금이라는 악기를 단순한 전통 악기의 범주에 머물게 하지 않고, 동시대적 사유의 장으로 확장해 온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간접적인 접촉과는 달리, 해금을 연구하고 배우는 독일의 학생들, 특히 해금 앙상블 K-YUL의 단원들에게 황재인의 방문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실제의 만남’이었다.

 

이번 공연은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기획되었다. 해금을 사랑하고, 이 악기를 학문적·실천적으로 공부해 온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하나의 악기와 한 명의 연주자를 ‘초대하여 함께 사유하는 방식’의 공연을 마련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렉처 콘서트는 그동안 이들에게 전례가 없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황재인은 K-YUL 해금 앙상블이 주최한 첫 번째 렉처 콘서트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총 여섯 개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그중 다섯 곡은 모두 황재인의 작품이었고, 마지막 한 곡은 K-YUL 해금 앙상블과 함께한 합주였다. 이 마지막 무대는 앙상블에 대한 격려이자, 전문 연주자와 학습자, 작곡가와 연주 공동체가 같은 무대 위에서 하나의 시간을 공유한다는 상징적 제스처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합주의 의미에 대해서는 본고의 후반부에서 다시 다루고자 한다.

 

 

공연의 첫머리는 정악(正樂) 〈경풍년〉이었다. 정악은 한국 전통음악 가운데 궁중과 사대부 계층이 향유하던 예술음악으로, 빠른 기교나 즉각적인 감정 표현보다는 소리의 균형, 음과 음 사이의 여백, 그리고 듣는 태도 자체를 중시하는 음악이다. 이 점에서 정악은 ‘연주자의 기술을 드러내는 음악’이라기보다는, 질서와 품위, 그리고 절제된 미학을 구현하는 음악이라 할 수 있다. 〈경풍년〉은 이러한 정악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곡이지만, 해금 독주로 연주되는 경우는 드물다. 정악은 본래 여러 관·현악기가 갖추어진 합주 편성으로 연주되며, 독주로 연주될 경우에도 대금이나 피리와 같은 관악기가 상대적으로 선호되어 왔다. 이는 해금의 음색이 정악의 ‘중심 악기’로 인식되기보다는, 합주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역할로 자리매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재인은 〈경풍년〉을 연주할 때마다 해금 정악만이 지닐 수 있는 담백한 표현력을 깊이 느낀다고 밝힌다. 이번 공연에서 드러난 해금의 소리는 화려하거나 과시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활의 압력과 속도를 극도로 절제한 상태에서 형성되는 음의 밀도가 두드러졌다. 소리는 넓게 퍼지기보다는 중심을 단단히 유지했고, 음과 음 사이에는 불필요한 장식 없이 긴 호흡이 남았다. 이러한 연주는 정악이 지향해 온 미학, 곧 사대부의 곧은 기개와 공적인 질서 속에서 개인을 절제하는 태도를 해금이라는 악기를 통해 다시 호출한다. 황재인의 활은 음을 밀고 당기며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마치 감정을 토로하기보다 임금에게 올리는 정직한 상소문처럼 차분히 존재를 드러내는 발화에 가까웠다.

 

두 번째 곡은 지영희류 해금산조였다. 앞서 연주된 정악과 달리 산조는 처음부터 독주를 전제로 형성된 장르이며, 개인의 해석과 즉흥성이 적극적으로 허용되는 음악이다. ‘산조(散調)’라는 명칭이 암시하듯 여러 선법을 훑어가며 느림에서 빠름으로 밀도를 축적해 가는 구조를 지니고, 이날 연주는 진양조에서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이어지며 그 상승 곡선을 분명히 그렸다. 산조의 핵심은 선율의 축적과 변형이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시김새는 흔히 한국 민속 선율의 보고로 불린다. 황재인의 해금산조 연주에서는 활의 날렵함과 강한 음의 농도가 특히 두드러졌다. 정악에서 보여주었던 절제와 균형 대신, 밀어붙이는 에너지와 중력을 가르는 힘이 전면에 놓였다. 활의 앞면과 뒷면을 끊임없이 뒤집고 꼬며 밀고 당기는 움직임은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기 이전에 감정을 조직하는 구조적 힘으로 기능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조의 첫음과 첫 파사제를 다루는 태도였다. 첫음을 단번에 ‘결정’해 버리기보다,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차례 되돌아오고 회기시키며, 첫 출발의 무게가 연주 전체에 걸쳐 조금씩 다른 결로 자라나도록 두는 방식이 들렸다. 그 결과 시작은 단지 도입부로 머무르지 않고, 진양조의 느린 호흡 속에서 이미 이후의 속도와 밀도를 예비하는 기준점으로 남아 있었다. 이 곡은 ‘해금의 앞면’으로서 전통을 어떻게 호출하는가를 보여주는 서론이자, 이후 전개될 창작곡들을 위한 청각적·개념적 워밍업에 해당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전통의 호출이 보존된 재현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재인은 전통이 지닌 서로 다른 얼굴, 절제와 폭발, 균형과 밀도를 하나의 악기 안에서 공존시키며, 그 양면성을 이후 프로그램 전체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앞선 두 곡을 통해 청중은 해금의 ‘앞모습’, 즉 한국 전통음악의 규범적 얼굴을 경험했다. 이제 작곡가 황재인의 음악 세계로 진입한다. 그 경계에 놓인 작품이 바로 해금산조 독주자를 위한 에튀드 〈만반(萬般)〉이다. ‘만반’이라는 제목은 ‘모든 것’, ‘온갖 경우’, ‘빠짐없이 갖추어진 상태’를 뜻하며, 이 작품이 지닌 기능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만반〉은 해금산조 연주를 위한 만반의 준비, 곧 산조 연주자가 감당해야 할 모든 신체적·음악적·정신적 조건을 점검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다섯 개의 에튀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쇼팽의 피아노 에튀드처럼 단순한 기술 연습을 넘어서는 예술적 연습곡이라는 성격을 분명히 지닌다. 다만 이번 공연에서는 그중 세 곡만이 연주되었다. 이는 생략이나 축약이라기보다, 전통 산조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전략적 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산조가 진양조에서 시작하듯, 〈만반〉 역시 청중을 놀라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시작은 곧 미묘한 긴장과 불안을 동반한다. 표면적으로는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이 서서히 축적된다.

 

첫 번째 에튀드 〈복조 다스름〉은 작은 미동의 반복으로 시작한다. ‘복조’란 여러 악조가 뒤섞인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 곡의 시작은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16분음표의 12박자 열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음 하나하나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조성의 경계를 끊임없이 흔든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것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1악장에서 들리는 지속적인 음의 미세 진동이다. 두 작품의 언어는 다르지만, 작은 움직임이 축적되며 시간 전체를 긴장 상태로 만드는 방식에서는 구조적 유사성이 감지된다. 특히 시♭ 음은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다음 국면을 예고하는 불안정한 축처럼 기능한다.

 

두 번째 곡 〈적막을 깨는 법〉은 조율로 문을 열었다. 산조 연주자에게 첫 음을 내는 순간은 늘 극도의 긴장을 동반하는데, 이 곡은 바로 그 첫 음의 무게를 감당하는 상태를 연습하기 위한 에튀드다. 〈복조 다스름〉에서 꿈틀거리던 시♭ 음은 이 곡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무언가를 ‘깨기’ 위해서는 오히려 끊임없이 되돌아가고, 규칙과 약속을 재확인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율은 마치 합의된 규약처럼 반복해서 조율되고, 그 위에서 비로소 파열의 가능성이 열린다. 세 번째 에튀드 〈하행 시김새에 대한 춤〉에서는 속도가 눈에 띄게 증가한다. 이 곡은 시김새, 특히 하행 시김새를 빠르고 정확하게 연습하기 위한 작품으로, 흘러내리는 소리와 꺾는 소리의 미세한 차이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곡의 인상은 단순한 속도감이나 화려함에 머물지 않고, 위로 치솟지 않으며, 오히려 목적을 지닌 추락의 궤적을 그린다. 이는 병리적인 붕괴가 아니라,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정확한 궤도로 하강하는 독수리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이다. 세 곡을 관통하는 인상은 통제 가능한 미세 반응에서 시작해 점차 통제 불가능한 증식과 분화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리는 하나의 몸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마치 몸통은 하나지만 다족을 지닌 생명체처럼 분화한다. 이 과정에서 연주자의 신체는 단순한 매개가 아니라, 음악적 사고가 직접 구현되는 장소로 드러난다. 〈만반〉은 연습곡이지만, 연습의 과정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준비하는 상태 자체를 음악으로 드러내며, 해금 산조라는 전통 장르가 요구해 온 신체와 정신의 조건을 가시화한다. 이 작품을 통해 황재인은 해금의 ‘뒷면’, 곧 전통의 그림자이자 창작의 실험실을 청중 앞에 펼쳐 보였다.

 

독주 해금을 위한 〈둘 묶어내기〉(Upbinding the Two, 2021)는 해금을 ‘서정적 독주 악기’로 규정해 온 관습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작품이다. 황재인은 이 곡에서 해금을 애절하고 아름다운 노래의 매개체로 한정하지 않고, 적극적인 주법 변형과 연주 행위의 재조직을 통해 잠재되어 있던 비르투오소적 음향 가능성을 전면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작품의 제목에 이미 압축되어 있다. ‘묶어낸다’의 동사는 단순한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이 작품에서 실제로 수행되는 연주 행위와 음향 생성 원리를 직접적으로 지시한다. 둘을 묶는다는 행위는 언제나 같은 난이도를 갖지 않는다. 때로는 복잡하고 고단하며, 어쩌면 지나치게 쉽기도 하다. 한복의 웃도리를 여미며 고름을 매는 동작처럼, 두 가닥은 서로를 지나치게 압박하지도, 느슨하게 흘려보내지도 않는 미묘한 균형 위에서 하나의 형태를 이룬다. 〈둘 묶어내기〉에서 ‘묶음’은 바로 이러한 신체적 감각에서 출발한다. 이 곡에서 해금의 두 줄은 결코 고정된 상태로 머무르지 않으며, 끊임없이 상하를 오가며 질주한다. 두 줄은 분리된 선율의 근원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결합과 해체를 반복하는 하나의 운동장치로 기능한다.

 

이 작품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지는 주법은 중음주법과 잉어질이다. 중음주법은 해금의 두 줄을 하나의 음향 덩어리처럼 동시에 다루는 현대적 특수주법이며, 잉어질은 왼손으로 현을 운지하다가 순간적으로 움켜쥐듯 묶어내며 고음역을 발생시키는 해금 고유의 전통 주법이다. 황재인은 이 두 주법을 단순히 병치하지 않는다. 각각을 변형·확장한 뒤 결합함으로써, 두 주법이 만들어내는 음향을 ‘효과’의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소리가 생성되는 과정 자체를 드러내는 구조적 장치로 전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곡이 특정한 음색이나 주법을 과시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묶이며, 어떻게 풀리는가라는 질문이 음악 전체를 관통한다.

 

실제 악보에 나타난 표기 체계는 이러한 작곡 의도를 분명히 한다. 조현, 운지, 활의 접촉 방식, 글리산도, 트레몰로, 보우드 트레몰로, 포르타멘토, 반복과 점진적 가속·감속, 그리고 미분음 표기는 연주자의 신체 움직임을 세밀하게 규정한다. 황재인의 운궁은 기교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활의 미세한 압력·속도 조절을 통해 음악적 긴장을 구조적으로 형성한다. 활은 현 위를 미끄러지듯 통과하며 순간적인 접촉과 이탈을 반복하고, 그 미세한 조절 속에서 해금의 두 줄은 분리된 음이 아니라 하나의 긴장된 음향장으로 묶여 드러난다. 이러한 운궁의 정밀성 위에서 조현과 운지의 빈번한 변화는 음고의 안정성을 의도적으로 흔들며, 음을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조정되고 생성되는 사건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특히 단 2도의 좁은 음정 폭을 굵고 느리게 농현하는 구간에서는, 음의 이동이 선율적 진행이라기보다 장력의 변형으로 체감된다. 소리는 상승하거나 하강하기보다, 내부에서 팽창하고 수축하며 하나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때 ‘둘’은 더 이상 두 개의 선율선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음향이 서로 다른 농도로 흔들리는 상태에 가깝다. 즉 해금의 두 줄은 대비를 만들기 위해 분리되기보다, 서로를 침투하고 간섭하며 하나의 스펙트럼을 구성했다. 이 지점에서 중음주법과 잉어질은 개별 주법의 목록이 아니라, 두 줄을 ‘묶어’ 소리를 생성하는 방식 자체를 조직하는 핵심 원리로 작동했다.

 

중음주법은 이 작품에서 특정한 음향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식적 기법이 아니라, 두 줄을 하나의 음향 단위로 조직하기 위한 핵심 원리로 기능했다. 중음주법은 두 줄의 음을 대비시키기보다 서로 간섭하고 겹쳐지며 하나의 혼합된 음향층을 형성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결과 청자는 두 개의 독립된 음을 분별하기보다, 농도가 끊임없이 변하는 하나의 음향 스펙트럼을 경험하게 되었다. 잉어질 역시 전통적 맥락에서처럼 순간적인 강조나 장식적 효과로 머무르지 않으며. 반복과 변형을 통해 하나의 지속적 음향 행위로 확장되고, 악보에 기입된 반복 기호와 속도 변화는 이 주법이 단발적인 제스처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축적되고 변주되는 물질임을 분명히 한다. 이 과정에서 소리는 점점 가늘어지거나 사라질 듯하지만, 밀도와 에너지를 상실하지 않았다. 또한 이 곡에서 작곡가는 소음을 제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발생시키는 거친 마찰음과 꺾이는 소리는 두 줄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음향 층위로 편입되었다. 특정 구간에서 들려오는 꺽꺽거리는 소리는 짝짓기 철의 두루미 울음을 연상시키지만, 이는 자연 모사의 차원이 아니라 소리와 소리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비정제된 상태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해금은 이 순간 노래하는 악기가 아니라, 소리의 발생 조건 자체를 노출시키는 악기로 전환되었다. 이 작품에서 해금의 두 줄은 반드시 ‘둘’로 인식될 필요가 없었다. 두 줄이라는 물리적 조건은 분리를 전제하기보다 혼합과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으로 기능한다. 음향은 명확한 경계를 가진 대비를 이루지 않고, 연속적인 스펙트럼 위에서 미세하게 이동하는데, 이는 서양 음악에서 흔히 나타나는 대위적 분리나 음향적 대비와는 다른 접근으로, 해금이라는 악기의 구조적 특성을 기반으로 한 고유한 음향 조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약 12분에 걸쳐 전개되는 〈둘 묶어내기〉는 전통과 현대, 주법과 음향, 기술과 표현이라는 이분법을 지속적으로 무력화했다. 악보에 촘촘히 기입된 주법 지시와 속도 변화는 연주자를 단순한 해석자가 아니라, 음향 생성의 전 과정을 수행하는 신체적 주체로 위치시킨다. 이 음악에서 들리는 것은 특정한 선율이나 음형이 아니라, 묶고 풀고, 누르고 비비며 만들어내는 행위 그 자체였다. 결국 이 작품은 해금의 가능성을 ‘확장’한다기보다, 이미 그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요소들을 전면화한다. 황재인은 다른 악기를 모방하거나 외부의 음향을 차용하지 않고, 해금이라는 악기의 물리적 구조와 연주 관습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 집요한 밀어붙임 끝에서 이 작품은 해금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질문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해금의 뒷모습은 실험적이라는 말로 환원되기보다는, 전통 악기의 내부 논리를 현대적 작곡 언어로 재조직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둘 묶어내기〉가 해금의 물리적 구조와 연주 행위를 전면화하며 ‘비일상적 음향’을 밀어붙였다면, 다음 곡 〈엄마야, 누나야〉는 그 긴장을 전혀 다른 결로 전환시키며 황재인의 음악 세계가 확장주법의 실험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 곡은 잘 알려진 노래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의 시가 지닌 단순하고 투명한 언어에 기대어 전승되어 온 가사를 황재인이 변주·편곡한 작품이다. 렉처 콘서트에서는 이 ‘단순성’이 독일 문학의 괴테, 특히 〈들장미(Heidenröslein)〉와의 비교 속에서 조명되기도 했는데, 비교의 핵심은 기교적 수사나 복잡한 상징이 아니라 어린아이도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쉬운 말이 오히려 더 깊은 정서와 기억의 층위를 호출한다는 점에 있다. 공연에서 이 편곡은 첼로 MR과 함께 제시되며 무대의 청각적 온도를 바꾸었다. 앞선 곡들에서 구축되었던 밀도와 마찰의 음향이 물러나고, 대신 석양이 넘어가는 시간대의 빛처럼 얇고 따뜻한 울림이 열렸다. 해금의 떨림은 감정을 과장하기보다, 사라지기 직전의 빛이 남기는 잔향처럼 길게 유지되었고, 그 안에서 전통의 노래는 동시대적 감각으로 다시 호흡했다. 이 순간 해금은 ‘앞면/뒷면’이라는 대비를 넘어서, 전통과 현대, 실험과 서정을 하나의 연속된 시간 속에서 조용히 접합하는 매개로 기능했다.

 

 

케이율과의 합주는 앞서 언급했듯, 전문 연주자와 학습 공동체가 같은 무대 위에서 시간을 공유한다는 상징적 제스처로 충분히 기능했다. 이어진 짧은 무대는 부채를 든 세 명의 K-pop 댄서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언뜻 보기에 해금의 시간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이 춤은 밀양아리랑을 주제로 부채를 들고 구성된 안무로, 전통 선율이 지닌 반복과 회전의 리듬을 신체의 움직임으로 번역한 장면이었다. 해금이 소리로 풀어냈던 호흡과 여백은, 이 짧은 춤에서 시각적 진동으로 다시 한 번 환기되었고, 그로써 공연 전체는 ‘전통–현대’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매체가 같은 시간 감각을 공유하는 장으로 확장되었다.

 

 

이날의 공연은 ‘해금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대신, 해금이 어디까지 스스로를 벗겨 보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정악의 절제에서 산조의 밀도, 에튀드의 신체적 훈련을 지나, 확장주법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음향의 지층까지, 서로 다른 층위들은 하나의 발전 서사로 정리되기보다, 각기 다른 시간 감각으로 공존했다. 그 공존은 설명과 연주가 번갈아 놓이던 렉처 콘서트의 형식 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말은 음악을 ‘해설’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청취의 방식 자체를 조정했고, 음악은 다시 그 말을 검증하거나 뒤집으며, 사고와 감각의 왕복 운동을 만들어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청중의 태도였다. 약 90분 동안 공연장은 거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도로 집중된 침묵을 유지했고, 그 침묵은 거리감이 아니라 동참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곡마다 해설을 맡았던 독일 학생들 (이렘, 바이레아, 올린, 코니)의 차분한 말은, 낯선 악기를 ‘설명된 대상’으로 박제하지 않고 ‘함께 듣는 대상’으로 열어 두었다. 그 결과 공연은 감상의 소비로 닫히지 않고, 청중 각자의 내부에서 다시 이어질 질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듣는 법’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익숙함과 낯섦, 전통과 현대, 실험과 서정이 서로를 평가하거나 대체하지 않고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조건이 되어 주는 장, 그 장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쉽게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의 침묵과 집중은, 해금이라는 악기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더 많이 ‘설명되고’ 동시에 더 많이 ‘들려져야’ 하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예고하고 있다.

 

 

글 | 노유경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음악학 박사, 쾰른대학교 출강
해금앙상블 K-YUL 음악감독 겸 단장
ynhovon1@uni-koeln.de
Instagram: @hangulmanse · @kyul_germany

 

【Rezension von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Die Klänge der Haegeum erklären – und hören
Der Komponist Jaein Hwang

als Protagonist eines geisteswissenschaftlichen Lecture-Concerts an der Universität zu Köln
Ort: Musikwissenschaftliches Institut der Universität zu Köln
Zeit: 6. Februar 2026, 16:00 Uhr

 

Am Freitag, dem 6. Februar 2026, um 16 Uhr fand im Konzertsaal des Musikwissenschaftlichen Instituts der Universität zu Köln das Lecture-Concert „Die Vorder- und die Rückseite der Haegeum“ des Komponisten und Haegeum-Spielers Jaein Hwang statt. Dieses Konzert war mehr als eine Aufführung im herkömmlichen Sinn: Es verband musikalische Praxis mit Reflexion und Erläuterung und entfaltete sich als genuin geisteswissenschaftliches Lecture-Format, in dem Denken, Sprechen und Hören untrennbar miteinander verschränkt waren.

 

Jaein Hwang ist in Korea als Komponist und Interpret bekannt, der bereits in jungen Jahren debütierte. Auch der Autorin dieser Rezension sind seine Arbeiten seit Langem vertraut – über Tonaufnahmen, Videoaufzeichnungen und zahlreiche online zugängliche Aufführungsdokumente. Diese Zeugnisse zeigen Hwang als einen Musiker, der die Haegeum nicht auf die Rolle eines „traditionellen Instruments“ reduziert, sondern sie konsequent in einen zeitgenössischen Denk- und Erfahrungsraum überführt. Für die Studierenden in Deutschland, die sich forschend und praktisch mit der Haegeum beschäftigen – insbesondere für die Mitglieder des Haegeum-Ensembles K-YUL – bedeutete seine Einladung jedoch weit mehr als eine weitere Begegnung mit bekanntem Repertoire: Sie war das lange erwartete direkte Gegenüber, das Erleben von Präsenz.

 

Aus diesem Kontext heraus wurde das Konzert konzipiert. Studierende, die die Haegeum nicht nur spielen, sondern sie auch historisch, ästhetisch und analytisch erforschen, luden einen Künstler ein, um gemeinsam mit ihm zu hören, zu denken und zu fragen. In dieser Form war ein Lecture-Concert für sie bislang ohne Vorbild. In diesem Sinne lässt sich Jaein Hwang als der erste Protagonist eines von K-YUL veranstalteten Lecture-Concerts bezeichnen. Das Programm umfasste sechs Teile; fünf der aufgeführten Werke stammten von Hwang selbst, der letzte Programmpunkt war ein gemeinsames Spiel mit dem Ensemble. Dieses Schlussstück fungierte weniger als Abschlussnummer denn als symbolische Geste: Professioneller Musiker, Lernende und musikalische Gemeinschaft teilten denselben Raum und dieselbe Zeit. Auf diese Dimension wird später noch zurückzukommen sein.

 

Den Auftakt bildete das Stück Gyeongpungnyeon, ein Werk aus dem Bereich der Jeongak, jener koreanischen Kunstmusik, die historisch im höfischen und konfuzianisch-gelehrten Milieu verortet ist. Jeongak zielt nicht auf Virtuosität oder unmittelbare Affekterzeugung, sondern auf klangliche Balance, auf die Spannung zwischen Ton und Stille sowie auf eine bestimmte Haltung des Hörens. In diesem Sinn ist Jeongak weniger Musik der Selbstdarstellung als eine Musik der Ordnung, der Maßhaltung und der kultivierten Zurücknahme. Gyeongpungnyeon ist ein repräsentatives Beispiel dieser Ästhetik, wird jedoch nur selten als Solostück für Haegeum aufgeführt. Jeongak ist traditionell als Ensemblemusik konzipiert, und selbst in solistischen Kontexten werden Blasinstrumente wie Daegeum oder Piri bevorzugt. Die Haegeum fungierte historisch eher als ausgleichendes Element im Gesamtklang.

 

Umso bemerkenswerter ist Hwangs Entscheidung, Gyeongpungnyeon immer wieder als Haegeum-Solowerk aufzuführen. Er betont dabei die spezifische Schlichtheit und Klarheit, die nur eine Haegeum im Jeongak-Kontext hervorbringen könne. In der Kölner Aufführung war der Klang weder dekorativ noch demonstrativ. Vielmehr entstand eine dichte Präsenz aus streng kontrolliertem Bogendruck und zurückgenommener Bewegung. Die Töne breiteten sich nicht aus, sondern blieben zentriert; zwischen ihnen öffnete sich ein weiter Atemraum ohne überflüssige Verzierung. Diese Spielweise rief jene Ästhetik auf, die Jeongak traditionell verkörpert: die Geradheit des Gelehrten, die Selbstdisziplin des Individuums innerhalb einer öffentlichen Ordnung. Hwangs Bogentechnik formte den Klang nicht als emotionales Bekenntnis, sondern als ruhige, sachliche Artikulation – eher einer aufrechten Eingabe an den Herrscher vergleichbar als einer subjektiven Klage.

 

Das zweite Werk war eine Haegeum-Sanjo im Stil von Ji Yeong-hui. Im Unterschied zur Jeongak ist Sanjo von Beginn an als solistisches Genre konzipiert und eröffnet einen weiten Raum für individuelle Auslegung und improvisatorische Gestaltung. Der Begriff Sanjo („verstreute Modi“) verweist auf eine Struktur, die verschiedene Modi durchschreitet und dabei von langsamen zu schnellen Tempi eine stetige Verdichtung vollzieht. In dieser Aufführung führte der Weg klar von Jinyangjo über Jungjungmori bis hin zu Jajinmori. Sanjo lebt von der fortlaufenden Transformation melodischer Bausteine; die Vielzahl der Sigimsae gilt zu Recht als Archiv koreanischer Volksmelodik.

 

Hwangs Interpretation zeichnete sich durch eine außerordentliche Beweglichkeit des Bogens und eine hohe klangliche Dichte aus. An die Stelle der jeongaktypischen Zurückhaltung trat eine vorwärtsdrängende Energie, eine Kraft, die gleichsam die Schwerkraft durchschneidet. Das stetige Wenden, Verdrehen und Gegeneinanderführen von Bogenfläche und -kante war dabei keine bloße Technik, sondern organisierte den emotionalen Verlauf der Musik. Besonders auffällig war der Umgang mit dem ersten Ton und der ersten Phrase: Statt den Anfang ein für alle Mal festzulegen, kehrte Hwang während der Aufführung immer wieder zu ihm zurück, ließ ihn neu aufscheinen und weiter reifen. So wurde der Beginn nicht auf eine Einleitung reduziert, sondern blieb über den gesamten Jinyangjo hinweg ein Referenzpunkt, der die spätere Beschleunigung bereits in sich trug. Dieses Stück fungierte als klangliches und konzeptuelles Aufwärmen für die folgenden Kompositionen – als ein Aufruf der „Vorderseite“ der Haegeum. Entscheidend ist dabei, dass diese Bezugnahme auf die Tradition keine konservierende Reproduktion darstellt. Vielmehr werden Gegensätze – Zurückhaltung und Explosion, Balance und Verdichtung – innerhalb eines Instruments zusammengeführt und zum Ausgangspunkt des gesamten Programms gemacht.

 

Nach diesen beiden Werken hatte das Publikum die „Vorderseite“ der Haegeum erfahren. Nun öffnete sich der Raum für Hwangs kompositorische Welt. An dieser Schwelle stand die Etüdenfolge Manban (萬般) für Haegeum-Sanjo-Solistin. Der Titel bezeichnet einen Zustand vollständiger Vorbereitung, ein „Alles-in-allem-Sein“. Manban ist als umfassende Vorbereitung auf die Sanjo-Aufführung konzipiert – als Prüfung aller körperlichen, musikalischen und mentalen Voraussetzungen. Formal besteht das Werk aus fünf Etüden, die – ähnlich wie Chopins Klavieretüden – weit über reine Technikübungen hinausgehen. In Köln wurden drei Etüden gespielt, was weniger als Kürzung denn als bewusste dramaturgische Entscheidung zu verstehen ist.

 

Die erste Etüde, Bokjo Daseureum, beginnt mit der Wiederholung kleinster Bewegungen. Obwohl die Oberfläche an eine regelmäßige Sechzehntelfolge erinnert, vibriert jeder Ton minimal und destabilisiert fortwährend das tonale Zentrum. Hier drängt sich ein struktureller Vergleich mit dem ersten Satz von Beethovens Mondscheinsonate auf: nicht im Klangmaterial, sondern in der Art, wie minimale Bewegungen ein dauerhaft gespanntes Zeitfeld erzeugen. Der Ton B♭ fungiert dabei weniger als Zentrum denn als instabile Achse.

 

Die zweite Etüde, Wie man die Stille bricht, öffnet sich mit einem Moment der Stimmung. Für Sanjo-Spielerinnen ist der erste Ton stets von existenzieller Spannung begleitet; diese Etüde widmet sich genau diesem Zustand. Der zuvor etablierte B♭ kehrt zurück und macht deutlich, dass das „Brechen“ der Stille paradoxerweise die wiederholte Rückkehr zu Regeln und Vereinbarungen voraussetzt. Erst aus dieser wiederholten Justierung heraus entsteht die Möglichkeit des Bruchs.

 

In der dritten Etüde, Tanz der absteigenden Sigimsae, steigert sich das Tempo deutlich. Ziel ist das präzise Training absteigender Ornamentik, doch der Eindruck ist weniger ein Aufschwung als ein kontrollierter Sturz – vergleichbar mit dem zielgerichteten Sinkflug eines Raubvogels. Über alle drei Etüden hinweg zeigt sich ein Übergang von kontrollierbaren Mikroreaktionen hin zu einer kaum mehr einhegenden Ausdifferenzierung. Der Körper der Spielerin oder des Spielers wird dabei selbst zum Ort musikalischen Denkens. Manban macht Vorbereitung hörbar und zeigt die Voraussetzungen, die Sanjo als Tradition fordert.

 

Mit Upbinding the Two (2021) unterzieht Hwang schließlich die Vorstellung der Haegeum als „lyrisches Soloinstrument“ einer radikalen Neubefragung. Durch die Reorganisation von Spieltechniken und Klangentstehung legt er die virtuosen Potenziale des Instruments offen. Der Titel verweist direkt auf das reale Tun: das Binden, Lösen und erneute Zusammenführen der beiden Saiten. Zentrale Techniken sind dabei Jung-eum-Spielweise und Ing-eojil, die nicht als Effekte, sondern als strukturelle Prinzipien fungieren. Geräusche, Reibungen und Brüche werden nicht eliminiert, sondern in die Klangschicht integriert. Die Haegeum wird hier zum Instrument, das die Bedingungen der Klangerzeugung selbst freilegt.

 

Das abschließende Stück Eommaya, Nunaya schlägt einen völlig anderen Ton an. Hwangs Bearbeitung des bekannten Liedes auf ein Gedicht von Kim Sowol wurde im Lecture-Concert mit Goethes Heidenröslein verglichen – nicht wegen formaler Ähnlichkeiten, sondern aufgrund der gemeinsamen poetischen Schlichtheit. Mit Cello-Zuspielung verwandelte sich der Klangraum: Die zuvor aufgebaute Dichte wich einer warmen, durchscheinenden Klanglichkeit, die an das Licht der untergehenden Sonne erinnerte.

 

Die gemeinsame Aufführung mit K-YUL erfüllte ihre symbolische Funktion bereits durch ihre Präsenz. Der anschließende kurze Auftritt dreier K-Pop-Tänzerinnen mit Fächern – choreographiert zu Miryang Arirang – wirkte zunächst überraschend, entfaltete jedoch eine eigene Logik. Die rhythmische Kreisbewegung des Tanzes übersetzte die musikalische Struktur in körperliche Resonanz und erweiterte den Aufführungsraum um eine visuelle Dimension.

 

Dieses Konzert versuchte nicht, die Frage „Was ist die Haegeum?“ zu beantworten. Stattdessen zeigte es, wie weit sich dieses Instrument selbst öffnen kann. Unterschiedliche Zeitebenen existierten nebeneinander, ohne in eine lineare Entwicklung gezwungen zu werden. Entscheidend war nicht ein Fazit, sondern die Erfahrung eines neu entstehenden Hörens. Die fast atemlose Stille des Publikums über neunzig Minuten hinweg war kein Zeichen von Distanz, sondern von Beteiligung. Die Erläuterungen der Studierenden – Irem, Vailea, Olyn und Conny – hielten die Haegeum nicht als erklärtes Objekt fest, sondern öffneten sie als gemeinsamen Erfahrungsraum.
Am Ende blieb weniger eine Antwort als eine veränderte Haltung des Hörens. Und genau darin lag die nachhaltige Wirkung dieses Abends.

 

Text | Dr. Yookyung Nho-von Blumröder
Musikwissenschaftlerin · Musikwissenschaft und Koreanisch/ Universität zu Köln
Musikalische Leiterin des Haegeum-Ensembles K-YUL
ynhovon1@uni-koeln.de
Instagram: @hangulmanse · @kyul_germany

 

 

 

 

노유경 평론가 atonal15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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