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세상이 흔들릴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도모한다. 그러나 진정한 전환의 시대에는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옳은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철학이 필요하고, 예술이 방황하지 않도록 방향을 비추는 비평이 절실해진다. 서양의 예술사는 그 혼돈의 순간마다, 철학과 비평이 어떻게 시대를 견인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고전에서 중세, 질서의 해체와 신학적 통합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고전 문명의 조화와 균형은 무너졌고, 중세는 신(神) 중심의 질서를 예술과 철학에 강요했다. 그 혼돈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이성과 신의 의지를 통합하려는 시도로 신학적 철학을 정립했고, 예술은 비잔틴의 상징성과 고딕의 숭고함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신에 대한 믿음조차도 비평 없는 순응이었을 때 예술은 정체되었고, 오직 질문이 있는 곳에서 르네상스는 태어날 수 있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인간의 재발견과 가치의 붕괴
르네상스는 고전의 부활을 외치며 인간 중심의 철학을 되살렸다. 에라스무스, 마키아벨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는 인간 존재의 존엄과 의지를 예술과 사유로 증명했다. 그러나 곧 종교개혁의 불길이 유럽 전역을 덮치면서 명예와 진리의 기준은 파편화되고, 모든 가치가 의심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때 예술비평은 단순한 감상의 언어를 넘어서, 미적 판단과 윤리적 기준의 재정립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의 누드 조각은 예술인가? 외설인가? 라는 질문이 당시에도 사회적 논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예술의 목적, 국가의 이상
18세기 계몽주의는 이성 중심의 철학으로 기존 권위를 타파했고, 예술은 인간과 국가의 이상을 시각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볼테르, 루소, 칸트는 인간 존엄의 근거를 철학으로 제공했고, 다비드의 회화는 혁명정신을 시각 언어로 고양시켰다. 이때의 비평은 단순히 기술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평가하는 공공적 사유로 발전했다. 괴테, 레싱의 문예비평은 독립된 학문이자 시대의 지성으로 자리 잡았다.
전후 실존주의 시대, 의미 없는 세계와 예술의 저항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대한 신념을 철저히 붕괴시켰다. 사르트르, 카뮈, 하이데거는 실존의 고통과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이 철학은 예술 속에서도 반영되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등은 체계적 질서를 부정하고 혼돈 자체를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시기의 예술비평은 더 이상 미와 기술을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 예술의 존재 이유, 작가의 윤리, 사회적 파급력을 묻는 윤리적 담론으로 진화했다.
지금, 예술과 철학은 다시 필요한가?
우리는 지금 또 한 번의 전환기에 있다. 세계적 전쟁의 위협, 인공지능의 급변, 기후재앙과 경제 불안은 인간의 조건 자체를 재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예술은 그 자체로 사유이고, 비평은 시대를 기록하는 지성의 언어다. 예술을 소비로 전락시키는 오늘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예술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예술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철학은 방향을 묻고, 비평은 흔들림을 바로잡아주며 기록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불안한 시대에 반드시 다시 붙들어야 할 예술과 사유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