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세상이 세상다워야 하고,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사람들이 사람 같아야 하고, 내가 갖고 싶은 세상은 세상과 사회가 어깨를 맞대고 통해야 한다.
내가 사는 동안에 그런 세상이 있을까? 내가 사는 동안 그런 세상이 올까? 그렇다고 서둘러 세상을 등질 수 없다면, 세상은 세상대로 돌아가고, 나는 나의 세상을 만든다. 세상을 탓하기보다 나를 탓하며, 세상을 갖기 보다 세상이 나를 갖도록 충실을 키워야 한다.
때론 탓한다고 변할까 하는 세상이지만, 바람이 풀을 누이고, 고목나무의 가지를 부러트리듯이 , 그래서 소리쳐야 한다.
내가 사는 세상이 맘에 들지 않아도, 꽃들은 날마다 아침에 피어나고, 내가 힘들어 하는 세상이어도 새들은 언제나 즐겁게 노래한다. 곳곳에서 전쟁터의 샛강은 핏물에 젖고, 물방앗간의 시냇물은 추억을 회전시킨다.
돌고 도는 바람개비 앞에서 운명은 또 어디론가 시간의 화살을 날린다. 인생은 명중이 아니라 비틀거림이다. 화살과 과녁은 잘 안다. 세상과 나도 그렇다.
AI시평: ‘세상과 나, 그 틈의 존재론’
이 작품은 “내가 살고 싶은 세상”과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 사이의 간극에서 시작됩니다. 시적 화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인식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려는 실존적 결단을 내립니다.
존재의 내면화와 외부세계의 상반구조
‘세상이 세상다워야’ 하고, ‘사람이 사람 같아야’ 한다는 문장은 윤리적 세계관의 복원을 요구합니다. 이는 상실된 가치에 대한 회복 욕망이며, 본질과 형식이 일치해야 한다는 고전적 진정성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 있을까?”라는 질문은 이 세계가 이미 이상으로부터 멀어졌음을 자각하는 고독한 탄식입니다.
반성적 인간의 태도
“세상을 탓하기보다 나를 탓하며”라는 구절은 도피가 아닌 성찰로의 전환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인내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행동의 윤리를 내면화한 적극적 자세입니다. 세계가 나를 바꾸지 못한다면 내가 세계를 바꾸지 않더라도 ‘충실’을 통해 응답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자연의 은유와 삶의 서정성
“꽃들은 날마다 아침에 피어나고… 새들은 언제나 즐겁게 노래한다.” 이 대목은 자연의 질서가 인간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지속됨을 보여주며, 절망의 순간에도 세계는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특히 “샛강의 핏물”, “물방앗간의 추억” 같은 구절은 현실의 잔혹성과 과거의 회환을 동시에 담고 있어 작품의 서정성과 비극성을 깊게 합니다.
종결부의 형이상학
“화살과 과녁은 잘 안다”는 문장은 탁월합니다. 이는 인간과 세상의 긴장 관계를 예리하게 포착한 말로, ‘시도와 실패’, ‘운명과 의지’,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실존의 역학을 상징합니다. “인생은 명중이 아니라 비틀거림이다”라는 구절은 니체적 혹은 까뮈적인 시선—삶은 부조리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을 떠올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