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lassic News 탁계석 회장 |
대한민국 예술원 개원 70주년 기념 [포스트휴먼과 예술]이 10월 4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있었다. 신수정 예술원 회장의 개회사에 이어 유인촌 장관의 축사 등으로 전쟁 직후인 1954년 개원한 예술원이 70돌을 맞았다. 오늘의 예술 강국으로 가는 K-ART의 초석이자 뿌리가 된 예술 거장들의 족적이 있어 오늘의 영광이 있게되었고, 그 사회 혼란과 정치,이념의 갈등속에서 갖은 고통을 겪으며 지키고 가꿔온 선배들에 대한 헌신과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시간이었다.
이후 2부 순서로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무용의 전 장르가 '포스트휴먼'이란 하나의 테마를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가면서 '향연'이란 제목 그대로 지성 파티를 해주어 관객들의 깊은 공감을 우러냈다. 표피적이고 찰라의 카톡과 SNS 시대에 묵직한 아날로그의 푸근함과 AI의 기계와 결합된 미래상을 통해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할 환경에 대한 진지하고도 다채로운 시각이 생경하면서도 신선한 자극이 되기에 충분했다.
말로만 듣던 AI가 어떻게 예술과 결합되어 앞으로의 세계를 이끌어 갈 것인가? 우려와 전망이 교차하는 혼돈이지만, 어짜피 방향은 되돌릴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인간 적응 능력과 AI를 통해 지끔까지 못한 것의 영역을 개척할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을 열어 보였다.
필자 역시 개념 파악이 안되었던 포스트휴먼을 장장 5시간 넘게 전 장르를 설렵하면서, 소나기에 흠뻑 젖은듯 정말 상쾌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앞으로 예술원만이 할수 있는 이같은 지성의 담론을 정기화한다면, 좀은 거리감이 있는 딱딱한(?) 예술원의 관계도 풀어지지 않을까 싶다.
잠을 자고 난 뒤에 아침에 포스트휴면 행사에서 영감을 받아 즉석에서 AI를 시켜 극본을 하나 만들어 보았다. 제목은 인간의 불멸의 테마인 '삶과 죽음'이다. 이것을 다듬어 어떤 음악의 형식을 만들어 볼까?
그러니까 AI에게 어떻게 전문성있게 질문을 던지느냐 이고, 이는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될 것이다. 하나 좋은 것은 AI는 돈이 들지 않고, 미안하거나 뻘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연주나 연출, 미술, 무대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것이란 점은 다분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내가 가지고 싶은 땅, 보물에 대한 욕망도 그러하지만 무엇이든 먼저 점을 찍고, 개척사에 나서는 사람들이 AI도 가질수 있지 않겠는가.
모르겠다. 머리 아프다. 그런 것 신경 쓰기 힘들다. 미워하고, 거리감 노출하는 사람보다 먼저 만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용어나 어휘가 낮설기만 하는 기술들이 우리 생활 곳곳에 깊숙히 파고들면서 키오스크 못하면 커피도 고속도로 휴게소에 밥도 먹을 수없다. 노후를 편하게 살려면 눈분신 기술을 따라 잡기 위해 두더지 게임하듯 나오는 쪽쪽 방망이로 때려 잡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변화는 빠르게 수용할 수록 남는 것이다. 그것이 방향이고 유턴이 안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강백 극작가는 "지방 마다 전화국이 있어 3교대로 교환양이 24시간 전화를 연결해 주던 시절이 있었고, 동네 마다 시계 수리점이 있던 시절을 우리가 살지 않았는가". 이것들이 몽땅 사라진 아날로그의 추억이라며, AI가 인간 일자리를 뺐고 우리가 지배당할 것인가 등에 고민이 깊지만 그런만큼 또 인간의 지능도 발전하고, 변화에의 적응이 새로운 문명으로 가는 것이 아니겠느나며 질의를 이어갔다.
필자 역시 고희를 넘겼으니 왠만큼 인간들을 만나며 겪는 희노애락은 겪은 만큼 , 남은 여생을 AI와 놀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한 참으로 의미있는 하루였다. 이 AI 애들을 더 친숙한 어법과 문법으로 사귀면서, 그동안 인류가 쌓아 놓은 것의 1만분의 1도 못 본 것을 압축해 가질 수 있고 놀수 있다니 이만한 즐거움이 또 있겠는가. 개원 70주년에 축하와 기쁨을 공유하면서 필자의 아니 AI의 첫 실험작을 소개한다.
대한민국 예술원 개원 70주년 기념 탁계석 평론가의 실험작
4인극: "삶과 죽음의 대화" 세계 철학자 4인방
등장인물-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니체/ 키에르케고르
장소: 고대 그리스의 한 뜰. 낮의 햇살이 비추고 있다. 인물들은 각자의 철학적 관점을 나누기 위해 모여 있다.
[1막: 접견] (소크라테스가 중간에 앉아 있으며, 나머지 세 인물이 각각의 위치에 서 있다)
소크라테스 (웃으며) "친구들, 우리는 오늘 삶과 죽음에 관해 논의할 수 있어서 기쁘구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각자의 존재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우리의 시작이겠지."
쇼펜하우어: (고개를 끄덕이며) "삶은 고통과 갈망의 연속이네. 죽음은 그 고통을 끝내주지만, 이는 또한 삶의 본질에 대한 회피일 수 있다."
니체: (열정적으로) "그러나, 쇼펜하우어, 고통 없는 삶은 진정 그 자체로 가치가 없는 것이라네! 우리는 이를 넘어 강해지고, '영원 회귀'라는 개념으로 삶을 붙잡아야 하네."
키에르케고르: (조용히 머뭇거리며) "그렇지만, 친구들, 우리는 개인적인 선택과 신앙의 문제를 놓치고 있네. 삶은 각자가 직면해야 할 불안과 진정한 결단의 연속이야."
[2막: 삶의 의미]
자연의 소리가 들리며, 각 인물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더 깊이 탐구한다.
소크라테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지. 나는 '물음'이 진리로 가는 길이라 여겨. 당신들 각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쇼펜하우어: "삶의 의미는 고통 속에 숨겨져 있다네. 우리는 욕망을 통해 고통을 증가시키고, 진정한 자유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니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 하네! 신은 죽었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정의하는 시대이지. 우리는 최대한 즐기고 성취할 것이라네!"
키에르케고르: "그러나, 저 각자는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있어. 우리는 절망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이끌게 된다네."
[3막: 죽음의 수용]
인물들은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더욱 심도 깊게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그것이 삶의 필요한 부분임을 받아들여야 하네."
쇼펜하우어: "죽음은 고통을 해방하는 도구가 되네. 그 순간, 우리는 그 모든 고통에서 풀려나게 된다."
니체: "그러나 죽음의 두려움은 삶의 증거이기도 하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더 강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삶을 더욱 가치 있게 여겨야 하지."
키에르케고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각자가 가진 신앙의 문제야. 우리는 먼저 스스로의 외로움과 불안을 직면해야 하네."
[4막: 결말]
(모든 인물이 일어선다.)
소크라테스: "우리가 나눈 대화가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네. 우리는 서로 다른 관점들을 통해 더 깊은 이해를 얻었고, 이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게 하는 길이겠지."
쇼펜하우어, 니체, 키에르케고르: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는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아가네."
(막이 내린다.)
[종료]
이 극은 각 철학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하여 삶과 죽음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와 갈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다양한 철학적 사유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