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원종섭 평론] 채기선의 붉은 한라산 - 화엄의 거룩한 빛

A Better Me
숭고한 절대자의 음성
화엄의 거룩한 빛

K-Classic News  원종섭 평론가 |

 

 

채기선의 붉은 한라산 - 화엄의 거룩한 빛

 

 

 

 

한라산  100호p  Oilon canvas   사진제공 채기선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다르다.”

-칸트 Kant

 

 

 

 

채기선의  ‘붉은 한라산’은 ‘ 화엄 華嚴의 거룩한 빛’이다. 그 붉은 빛깔의 파장으로 우주에 편재하는 숭고한 절대자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 속엔 제주의 바람소리와 제주 사람들의 한 맺힌 고난의 목소리와 유년 시절 밭일을 하다 뛰쳐나가던 소년 채기선의 돌밭담을 넘는 자유의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화엄 華嚴 Flower Ornament이란 '여러 가지 꽃으로 장엄하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채기선 작가는 한라산을 화엄의 세계로 광명의 발원지로서 영원한 빛의 세계로 만들었다. 그 세계는 생로병사의 세계가 아니고, 영원한 빛의 세계이다. 불투명과 추함이 소멸된 곳이다.

 

채기선의 ‘붉은 한라산’처럼 집중도가 뛰어난 작품은 나란히 전시되어있는 다른 작품을 제치고 오직 그 그림에 관심을 끌도록 감상자의 주의를 통제한다. 출중한 외모나 신비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특출한 고유성을 소유한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수려한 기교로 잠시 감상자의 시선을 강력하게 잡아두더라도 그림이 풍부한 이야기와 감정을 전하지 못하면 그다지 오래 머무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채기선의 작품엔 그 모든 요소들이조화롭고 밀도 높은 구성을 이룩했을 때의 고조가 있다. 그림의 고밀도는 집중도를 높이는 동시에 그림에 질량감을 더하여 치밀도를 높인다. 그의 걸작 ‘붉은 한라산’은 화려한 기교와 치밀한 계산을 먼저 드러내지 않고 오직 보여주고자 하는 본질을 내보인다.

 

 

한라산  100호p  Oilon canvas  사진제공 채기선

 

 

‘붉은 한라산’은 감상자의 시선을 최대한 기적에 집중시키기 위해서, 배경에 다른 소재를 전혀 삽입하지 않고 단순하게 처리했다. 개체의 명암대비를 극대화하여 극적으로 표현한다. 집중도를 고조시키는 일등 공신은 빛의 강렬한 대비와 극적인 구성방식이다. 매우 지적이며 세련된 매력을 풍긴다. 

 

사실 채기선과 같은 예술가는 그림을 완성하여 전시하는 목적보다 긍정적 중독과 같은 ‘혼연일체 All in One’의 상태를 연장하기 위해 창작을 지속한다. 탁월한 감상자는 작품에서 예술가의 몰입도도 고스란히 감지할 수 있다. 조화로운 구성에는 지혜로운 시각적 구성도 중요하지만, 감상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정적 호소도 매우 중요하다. 예술가는 응집되고 농축된 폭발력으로 생명력을 표현하려면 감상자에게 내재된 인간의 근원적 욕구와 질문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채기선은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대학교와 경기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작가는 화업에 입문한 시절부터 한라산 그림을 즐겨 그리며 제주의 풍경과 해녀 연작에 천착했다. 1995년 제주의 자연전을 필두로 40대 중반 무렵부터는 애견과 여인 연작 등을 선보이면서 작가적 역량과 함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200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한라산’이 서양화 대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2018 남북정상회담 국빈선물로 ‘한라산 작품 150호’가 선정되면서 그에게는 자연스레 ‘한라산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채기선하면 ‘한라산’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도 작가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한라산이다. 예전의 한라산 그림은 화폭에 많은 것이 녹아들어 있다.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대지의 생명력이 움트고 어머니 품처럼 넉넉한 한라산을 이야기했다. 그림 한 폭이 곧 화산섬 제주이자 섬을 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한라산  100호p  (162x75cm)  Oilon canvas  사진제공 채기선

 

 

채기선의 ‘한라산’ 화풍은 조금씩 변화를 거듭한다. 구도와 기법은 보다 단순해지고, 화폭은 푸른색, 붉은색 위주로 변한다. 수십 번 덧칠을 반복하면서 농도와 명암의 강약만으로 한라산을 표현하게 된다.

 

 

“1996년 2월 제주 오름을 걷다가 우연히 붉은 한라산을 마주하게 된다.

너무도 강렬한 이날의 경험으로 자연 풍경으로 보다는

감정으로 바라본 한라산을 그리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의 한라산이었다면,

최근에는 좀 더 가까이 한라산 백록담을 그리게 되었다.” -채기선

 

 

“한라산은 나의 삶 그 자체이다. 경기 양평의 본 작업실에서도 한라산을 그린다.

나의 생각은 온통 제주와 한라산이다.

붉고 밝은 강렬한 한라산은 4.3의 붉은 피를 넘어,

태양을 그 옆에 그리면서 붉게 물든 한라산을 통해 희망을 전하고 싶다.” -채기선

 

 

최근 채기선의 작품들은 깊고 친밀한 감정들을 탐구하는 내면으로 독자들을 끌어 들인다. 그에게는 장엄과 숭고와 고독을 바라보는 특유의 시선eyes이 있다. 대상을 간명하게 드러내는 기법들과 공감을 붙잡아내는 통찰력, 마음을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회화적 감수성 susceptibility의 힘이 있다.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최근 그의 작품은 갈수록 자아  탐구와 실존의 본질에 파고 든다. 

 

백록담안에 북두칠성을 그려 놓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또 하나의 멋진 작품이 완성된다.

 

“나고 자라고 죽고 그러한 별을 그리는 자체로 신비로운 것,

백록담의 담수가 더욱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신비로움과 긍정적 존재감 그리고 희망의 좋은 기운 붉은 한라산은

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는 미래적 그림이다.” - 채기선

 

 

어머니  91x60.6cm  Oilon canvas  2021  사진제공 채기선

 

 

이어 인터뷰에서 

 

“해녀를 그릴 때는 표현기법도 마음도 한라산을 그릴 때와는 전혀 다르다.

붓을 터치하는 방식도 캔버스를 앞에 두고 대상을 대하는 자세도

질감의 결도 다르다.

잘 그려야한다는 생각도 내려놓게 된다.

 

 

해녀를 그릴 때면 내면의 뭉클한 감정들이 자꾸 밖으로 쏟아졌다.

지금도 상군해녀로 살고 계시는 나의 어머니 생각에

울컥해서 붓을 잠시 내려놓을 때도 있었고,

울컥해서 물감을 캔버스에 쏟을 때도 있었다.

그 뭉클한 감동이 내면에 차오르면,

 

 

물감을 붓에 잔뜩 바르고 캔버스에 두껍게 쏟아 부었는데,

마치 뭉클한 감동을 쏟아내는 기분이 들었다.

내 작업의 원천은 한라산과 바다의 어머니인 해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애묘와 여인 - 공존과 치유 9    97x130.3cm   Oilon canvas  2022  사진제공 채기선

 

 

모든 예술가에게 작품을 제작할 때 어느 단계에서 멈춰야 성공적인지를 간파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너무 적게 그려도 너무 많이 그려도 작품의 완성도 degree of perfection를 떨어뜨린다. 소심했던 프랑스 나비 파 Les Nabis 화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는 자신의 개인전을 개막하기 직전까지 전시장에 붓을 들고 다니며 그림을 수정하기도 했다.

 

 

“  2023 붉은 한라산 1000호를 완성하는데 30년이 걸렸다 ”  -채기선

 

 

실패와 성공 이 두 단어 사이에는 ‘도전’과 ‘끈기’라는 언어가 숨어 있다.

 

“ 내가 이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 했는지를 안다면

사람들은 더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 - 미켈란젤로

 

 

예술가라면 모두 자신의 태만함을 숙연히 반성하게 하는 말이다.

 

채기선의 한라산은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한라산의 명확한 세부묘사와 대범한 표현을 동시에 양극단으로 확장해서 사용했다. 극도의 섬세함과 대범함이 조화롭게 공존하려면, 상반되는 치밀한 성향과 자유로운 기량들이 함께 발휘 되어야 한다. 섬세함이 보여주는 정적인 감성과 자유로운 대범함이 나타내는 동적인 감성이 대비되면, 더 극적인 표현이 된다. 양극이 지혜롭게 결합하면 극치의 조합으로 생성되는 반전과 완벽성이 나타난다.

 

 

한라산2  259x162cm   Oilon canvas  사진제공 채기선

 

 

화가 채기선의 자신감은 특별한 긴장감을 연출하여 그림에 생기와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채기선의 한라산 시리즈는 감상자가 그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보아야 한다. 가까이서 관찰하면 세부묘사와 사물의 경계선이 매우 흐릿하여 전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감상하면, 모호해 보이던 경계가 명료해지면서 마법처럼 굉장한 에너지 파동이 개체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거침없는 붓 터치와 형태의 모호한 경계는 사물과 인물의 형태를 흔들리게 하여 불안정하면서도 동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런데 이 느슨한 경계는 흐릿함과 선명함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극도로 아슬아슬한 경계수위에서 형성된다. 

 

 

예술을 하는 것과 채기선 화가처럼 직업 예술가로 사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갑자기 아무나 직업 클래식 음악 연주가나 무용수가 될 수 없듯이 미술가도 마찬가지다. 발레리나가 발 모양이 기형적으로 변형될 만큼 모진 수련을 하듯이 눈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진정한 직업 미술가의 고민과 노력은 치열하다. 선천적 미적 감각과 소질을 가지고 어릴 때 수련을 시작하여 오랜 기간 몰두를 지속한 예술가는 아무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른다.

 

 

“ 보는 만큼 보인다. ”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그런데 배워서 알 수 있는 영역과 타고난 감각이라고 할 수 있는 ‘직관’으로 인지하는 영역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논리적 logical 지식은 지성과 교육으로 얻어지며 보편적이다. 직관적 Intuitive 지식은 상상과 감정으로 얻어지며 개체성에 속한다. 예술은 미학, 인문학, 과학과 달리 배워서 아는 지식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분야다. 즉 논리를 넘어선 예술 특유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이미 선천적인 미적 감각 aesthetic sense을 보유해야한다.

 

예술가 채기선은 작품 제작 중에도 자유와 충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숨겨진 깊은 욕구와 의미를 발견한다. 의도치 않았던 우연과 무의식의 반영은 참신함과 활력을 드러내는 창작 특유의 묘미다. 장인은 수십 년간 획일성과 규칙을 익히고 숙련된 기술력을 발휘하며 일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상상과 모험을 통해 항상 획일성과 규칙을 확장하고 초월하기 위해 탈구조를 추구하면서 창조한다.

 

 

한라산  116.8x91cm(50M)  Oilon canvas 사진제공 채기선

 

 

붉은 한라산과 같은 걸작의 창조가 우연이 아닌 의도적인 반복이 되려면 예술가는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미적 체계를 명확하게 모르면 시시각각 달라지는 작품의 회화적 조건에 알맞게 응용할 수 없다. 응용할 수 없다는 것은 미적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왜 조화로운지, 왜 부조화 적인지를 적절하게 설명하고, 응용하여 창조할 수 없으면 결코 뛰어난 미적 감각의 소유자가 아니다.

 

 

“ 시인은 보이는 세계를 표현하는 데는 화가보다 아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데는 음악가보다 아래다. ” 

-다빈치

 

 

시인은 화가와 음악가만큼 완벽하지는 않으나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작품이 걸작이 되려면 예술가는 걸작의 수많은 조건을 거의 모두 충족시켜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다. 반면에 걸작의 조건을 몇 개만 충족시키지 못해도 아주 쉽게 졸작으로 전락한다. 작은 부조화의 산물로서 걸작을 만드는 다양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나타난다. 그래서 걸작의 탄생이 어렵다.

 

 

 채기선 작가의 제주 삼달 작업실 인터뷰 중

 

 

 

“ 연결된 것과 보이지 않는 실상들을 붓끝으로 표현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나의 영혼적이고, 진실한 생각을 표현해 보려고 한다.

삶이 현실 같지만 곧 과거다. 그래서 좀 더 희망을 극대화 하려고 한다 ”     

-채기선

 

 

작가 채기선의 이상과 반복되는 창작방식은 그만의 예술적 특성으로 고착된다.  그의 예술에는 그야말로 예술가의 타고난 미적 감각과 직관 그리고 기질과 상상력이 축적되어 어우러져 있다. 작가 채기선이 주목을 받는 이유이다.

 

 

어느날  K-Classic의 [세계현대시 칼럼]  루이스 글릭의 시 ‘ 눈풀꽃 ’을  채기선 작가에게 보냈다.  그의 답장은 이랬다. "제가 항상 작업중에 곁에 걸어두고 있는 시 입니다' 라며 주말 화실의 모습을 보내왔다.

 

 

 채기선 작가의 양평 문호 작업실 모습  기둥에  루이스  글릭의 시 눈풀꽃과  검정 스피커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루이스 글릭의 눈풀꽃 1연

 

 

 

 

 

 

 

 

평론가 원종섭

 

 

원종섭  WONG, JONG SUP

시인,  길위의 인문학자, 한국예술비평가협회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