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국악학자 송방송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19일 숙환으로 별세

음악계의 큰 별; 송방송 교수를 추모하며

K-News 관리자 기자 |

 

 

국악학자인 송방송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가 19일 오전 3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서울 출신인 고인은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국악 이론을 전공했다. 이후 캐나다 토론토대를 거쳐 미국 웨슬리안대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인은 1975년 캐나다 맥길대 음대 조교수를 지내고 귀국해 1978년 제4대 국립국악원장을 역임

했다. 또 영남대 음대 교수 및 한예종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교수를 지냈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음악사학회를 창립했으며 회장과 이사장을 맡았다. 발행인으로서 '한국음악사학보'를 매년 두 차례 발간했으며, 2007년엔 평생 모은 국악 자료 1만여 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고인은 문헌 연구를 통해 한국음악사학의 체제 정비 및 학문적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조선 후기 의궤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궁중정재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통령 표창 및 난계국악대상(1978년), KBS 국악대상 출판상(1998년), 난계악학대상(1999년), 제25회 방일영국악상(2018년), 제6회 한성준예술상(2020년) 등을 수상했다.

 

대표 저서로는 '한국음악통사', '한국음악사논고', '한국음악학의 현단계', '한국 근대 음악인 사전', '한겨레 음악인 대사전' 등이 있다.

 

올해 초에는 제6회 한성준예술상 수상을 기념해 자서전 '음악학자 일해(一海)의 학문인생'을 펴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송경환 씨와 아들 송상원(캐나다 주재 자영업)과 딸 송혜원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1일 오전 5시 15분이다.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 연합뉴스  ☎ 02-3410-3151 

 

 

전인평 선생의 추모사 

 

 

음악계의 큰 별; 송방송 교수를 추모하며

전인평(중앙대 명예교수)

 

 

얼마 전까지도 전화로 논문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던 송방송 교수님의 갑작스런 별세 소식이 들려 왔다. 전화 문자를 보는 순간,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참으로 순간의 일이구나 싶었다.

송교수는 필자보다 나이는 두 살 많지만 서울대학교에서는 필자가 한참 후배였다. 필자가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악계 감독관으로서의 일해(一海) 선생님

 

 국악계에서 그를 ‘기록의 귀재’라고 불릴 만큼 일해 선생님은 기록에 매달려 왔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는 기계의 나사처럼 정교하다. 그의 논문 심사를 받아본 사람들은 심사를 받는 동안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일해 선생님은 자신의 논문 작성법을 “음악학술지 편집체제 통일안”으로 만들어 다른 저널에도 적용하도록 권고하였다. 이러한 채근 덕택에 국악계의 논문은 다른 분야  즉, 무용 연극 미술 등의 분야와 비교해 보면, 상당히 잘 정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송교수가 국악 이론계의 감독관 역할을 철저히 수행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일해 선생님은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가장 서평을 많이 쓰는 분이다. 서평이라는 것이 저널에 수록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원고료를 주는 것도 아니고 책이 나오면 책 두 권과 별쇄본을 받을 뿐이다. 말하자면 전혀 돈이 안 되고 수고로움만 끼치는 작업이다. 그런데도 이 작업을 쉬지 않고 계속하는 분이 송방송 교수이다.

 

컴퓨터 앞에서 한 평생을 지낸 일해 선생님

 

일해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대하는 그의 모습은 항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평생 지속되어 지금까지도 한결같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는 수 백편의 논문과 30여권의 저서로 남아있다.

 

그가 남긴 30여권의 저서 중에서 필자에게 특별히 영향을 끼친 책들을 소개해 보겠다.

첫 번째 책은 『韓國音樂通史』(일조각, 1984)이다. 『東洋音樂槪論』(세광음악출판사, 1989) 등  수많은 책을 출간하셨고, 마지막 역작으로는 30여 년간 다듬은 책은 『한국근대음악인사전』(보고사, 2009.)·『한국현대음악인사전』(보고사, 2011)·『한겨레음악인대사전』(보고사, 2012.)·『한겨레음악대사전』(보고사, 2012)으로 집대성되었다. 그동안 끈질기게 30여 년 간 붙들고 지속한 작업이 마침내 한국음악악계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일해 선생님이 국악계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한국음악사학회를 창설하고 『韓國音樂史學報』를 창간하여 발행한 것이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학회지 발간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일해 선생이 이 어려운 일에 앞장 선 것이다.

 

한국음악사학보의 창간과 육성

 

일해 선생님이 국악계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한국음악사학회를 창설하고 『韓國音樂史學報』를 창간하여 발행한 것이다. 이 저널이 창간되던 1988년 당시만 해도 국악 관계 저널은 한국음악학회의 『한국음악연구』 하나 뿐 이었다. 당시는 학계의 형편이 워낙 어려운지 논문 집필자들에게 발간비를 부담하도록 하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일이다. 난데없이 일해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형편 되면 프레스센터 19층으로 나오게. 내가 점심을 사 줄 터이니...” 필자는 일해 선생님이 왜 나에게 왜 점심을 사준다고 할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프레스센터로 향하였다. 프레스센터에서 들은 이야기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그는 매주 주기(週期)를 쓰는데, 이 주기에 만나고 싶은 사람 이야기를 적는다고 한다. 그래서 주기에 적을 이야기를 들으려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국예술종합학교 창설자인 이강숙 박사도 만났다고 들려주었다.

 

“한글 저널 발행도 어려운데 어떻게 영문 저널 발행을 결심하였나?”

“제가 국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교수랍시고 대접 받고 살았는데, 나도 무엇인가 국악계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왜 영문학술지인가?”

“아시는 바와 같이 국내에 음악 저널이 10여종이 나오는데, 모두 한글로 나오고 있지요. 그래서 영어권 학자들이 한국음악 관련 연구 성과를 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권 학자들에게 한국의 연구 성과를 전하려고 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을 터인데, 어떻게 마련하는지?”

“이 일을 시작하면서 비용이 모자라면 ‘내가 부담한다’고 회원들에게 선언을 했습니다. 회비, 도서 판매 대금으로 약간의 수입이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지요. 그래서 모자라면 전액 제가 부담합니다.”

“이제 해외 정기 구독기관이 50여 기관이 있고, 가끔 한국문예술위원회에서 기금도 받아 그럭저럭 잘 꾸려가고 있습니다.”

 

2002년 영문 음악학술지 『Asian Musicology』 창간호를 발간하고 여러 곳에 보냈는데 제일 처음 반응을 보인 분이 일해 선생님이었다. ‘내가 저널을 발간하고 있기 때문에 과부 설움은 과부가 제일 잘 안다’면서 1호 정기 구독 회원으로 등록해 주었다. 그리고 같은 학교 이진원 박사에게도 “이 박사도 여기에 회원으로 가입하면 좋겠네.”하고 추천하여 2호 정기구독 회원이 되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응원해 주어 2021년 현재 31집을 출간하였는데, 이처럼 꾸준히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일해 선생님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

 

복 많이 받으신 일해 선생님

 

일해 선생님은 1960년 서울대학교 음대 국악과(國樂科) 입학 후 1968년 캐나다 토론토(Toronto)대학교 대학원 음악학 박사과정을 수학한 후 1973년 미국 웨슬레얀(Wesleyan)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이후 1975.9.~1977.8. 캐나다 몬트리올(Montreal) 맥길(McGill)대학교 음대 조교수, 1978.1.~1980.2.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 원장, 1980.3.~1998.2.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 음대 국악과 교수, 1983.3.~1985.2. 영남대학교 음대학장(音大學長), 1988.1.~현재 사단법인 한국음악사학회(韓國音樂史學會) 이사장, 1997.1.~1999.6. 음악학연구회(音樂學硏究會: 현 韓國音樂學學會) 제2대 회장 역임, 1998.3.~2000.2. 문화관광부(文化觀光部) 문화재전문위원(文化財專門委員), 1998.3.~2008.8.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傳統藝術院) 한국예술학과 교수, 2008.9.~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韓國藝術綜合學校) 명예교수, 2009.3.~2011.2. 중앙대학교(中央大學校) 대학원 초빙교수(招聘敎授)를 역임하였다. 2008년 1월에는 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館)에 송방송문고(宋芳松文庫)를 설치하고 기념전시회를 열었다. 또 2018년 11월 제25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 2019년 한성준예술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는 복을 타고 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악원장 취임부터 영남대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부임 등 어느 곳을 가든지 일해 선생님이 필요해서 모셔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88만원 세대’라며 아우성이다.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열심히 살아온 학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도 대학의 시간강사 자리도 얻기 힘든 형편이다.

 

일해 선생님은 살아오면서 취직하기 위하여 누구에게 술을 사거나 밥을 사며 부탁한 일이 없는 것 같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국악원장으로 오라는 부탁을 받았고, 이어서 영남대로 그리고 한국종합예술학교로, 모두 사람들이 아쉬워서 그를 모셔갔다. 이것은 한 평생 열심히 살아왔고 반듯하게 살아가려고 애쓴 결과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생활 태도를 갖고 살아도 발탁받는 기회가 매우 적다. 이들 앞에는 강사 자리도 치열한 경쟁이 앞을 가로 막고 있다. 이러한 송교수의 큰 복덕(福德)은 송교수 전생에 큰 업을 지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쓴 일해 송교수님의 자서전 서평이 인쇄되어 나온 것이 겨우 두 달 전이다. 그의 자서전 마지막 장을 진한 감동으로 덮었던 일이 바로 얼마 전이다. 일해 선생님의 생(生)을 반추해 본다.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선구적 삶을 살아온 한 평생이었다. 그는 한시도 무료하게 지내는 분이 아니다. 무엇인가 일을 찾아 꾸준히 하시는 분이다.

 

이제 컴퓨터도 내려놓으시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든든하게 음악계를 지켜가는 후학의 활동을 흠쾌한 미소로 바라보시면 응원해 주십시오. 일해 송방송 교수님의 명복을 빈다.

 

2021년 8월 19일  

전인평(중앙대 명예교수/ 아시아음악학회 회장)